▲ 네덜란드 정부가 ASML 등 반도체장비 기업의 중국 수출을 규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블룸버그 보도가 나왔다. ASML이 생산해 공급하는 EUV(극자외선) 반도체장비 이미지. |
[비즈니스포스트]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에 ASML 등 기업의 고성능 반도체장비 수출을 금지하는 수출규제 조치를 이른 시일에 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ASML이 중국 매출에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EUV장비 가격을 더 높이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주요 고객사가 부담을 떠안게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블룸버그는 8일 관계자를 인용해 네덜란드가 이르면 내년 1월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장비 수출규제 조치를 새로 내놓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그동안 중국에 일부 반도체장비 수출을 중단해달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이 반도체 장비시장에서 중요한 수출 국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외교관계 및 경제적 협력 등 가능성을 고려해 결국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블룸버그는 네덜란드가 앞으로 14나노 이하의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자국 기업의 장비를 중국에 수출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10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수출규제와 비슷한 수준의 제재를 적용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가 이런 조치를 시행하면 장비업체 ASML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기업으로 꼽히고 있다. ASML 전체 매출에서 중국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반기 기준 약 19%에 이른다.
ASML은 최근 컨퍼런스콜 등 행사에서 미국 정부의 중국 수출규제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이는 글로벌 전체 반도체 공급망 차질로 이어져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ASML의 주력상품인 노광장비에 미국 기업의 기술이 사용되고 있는 만큼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 정부의 수출규제 압박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ASML이 결국 이번 규제로 중국에서 받을 타격을 만회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결국 ASML이 중국 이외 국가에 수출하는 반도체장비의 가격 상승을 이끄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고개를 든다.
ASML이 고사양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에 사용되는 EUV 극자외선 반도체장비 시장에서 완전한 독점체제를 갖추고 있어 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EUV장비 수요는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와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기업의 시설투자 확대 및 미세공정 기술 경쟁 심화에 따라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공급망 차질과 인력 부족 등 문제로 EUV장비 생산과 공급도 원활하지 않아 해당 장비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반도체기업들의 선점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피터 베닝크 ASML CEO가 11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윤석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한국과 사업 협력 확대를 논의했을 정도다.
▲ 삼성전자가 EUV장비를 주로 도입해 활용하는 화성 반도체공장. |
EUV장비는 올해 초 기준 1대당 1억5천만 유로(약 2080억 원) 안팎의 고가에 판매된다. 3나노 미만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에 쓰이는 차세대 하이NA EUV장비의 가격은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전 세계 반도체기업들이 앞다퉈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는 만큼 ASML이 EUV장비 가격 인상을 통해 중국 수출규제에 따른 실적 타격을 만회하려 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TSMC가 미국 파운드리공장에 들이는 시설투자 규모를 기존 12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늘리고 첨단 반도체공정을 적극 도입하기로 한 점도 EUV장비 공급 부족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결국 미국의 반도체장비 수출 규제에 따른 영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기업에 EUV장비 가격 부담이 커지는 등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는 셈이다.
증권전문지 시킹알파는 “ASML은 현재 반도체업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지위를 갖추고 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라며 “완전한 독점체제를 통해 수익성 확보에 유리하다”고 평가했다.
베닝크 CEO는 이미 2분기 콘퍼런스콜을 통해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인플레이션 등 영향으로 반도체장비 가격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시사했다.
그는 “고객사 및 협력사들과 생산 원가 인상에 대한 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원인에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네덜란드 정부의 수출 규제로 중국 매출에 타격을 받게 되면 ASML이 고객사에 공급하는 EUV장비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이는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업의 투자 부담과 반도체 생산 단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자제품 가격 상승을 이끌어 소비자들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는 최근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미국의 반도체장비 수출 규제를 두고 “한국과 일본 등 주요 반도체 생산 국가들과 협의를 거쳐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ASML 등 기업의 중국 수출 중단이 전 세계 반도체기업 및 공급망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예측하고 최선의 방안을 찾는 데 힘쓰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