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미국 정부의 반도체 및 전기차 지원법에 대응해 자체적으로 대규모 지원 정책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 <로이터>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이 미국 정부를 뒤따라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등 주요 산업에서 자급체제를 강화하고 유럽 국가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정책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 등 한국기업이 유럽에 투자해 경쟁력을 강화할 기회라는 해석이 나오는 반면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5일 로이터 등 외국언론 보도에 따르면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은 현지 반도체 생산 확대에 모두 450억 유로(약 62조 원) 규모의 지원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합의했다.
유럽연합 당국 관계자들은 12월1일 회의를 열고 해당 정책을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논의되어 온 유럽의 반도체 지원 법안이 마침내 구체화돼 실행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유럽에서 반도체공장 투자 지원 논의에 속도가 붙은 계기는 미국 바이든 정부가 최근 의회 동의를 거쳐 520억 달러(약 69조 원) 규모 반도체 지원법 시행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자급체제를 구축해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 국가에서 반도체 수급 의존을 낮추고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을 두고 해당 법안을 도입했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 인텔과 마이크론 등 글로벌 대형 반도체기업이 정부 지원을 노려 잇따라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공장 투자를 시작하면서 미국 정부의 계획은 성공적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연합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노려 글로벌 반도체기업의 활발한 현지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목표 아래 공격적 수준의 지원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반도체에 이어 전기차와 배터리 등 친환경 산업에서 유럽 내 생산 투자를 유도하려는 정책도 논의되고 있다. 이는 바이든 정부에서 시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유사한 내용이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9월부터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던 ‘유럽 자주권 펀드’ 조성 계획을 구체화하는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유럽 자주권 펀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맞서 전기차 등 친환경 산업에 생산 투자 지원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세계 친환경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세계 주요 전기차 및 배터리업체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응해 미국 내 공장 투자를 확대하자 유럽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폴리티코는 “미국의 정책적 지원에 위기를 느낀 유럽이 ‘지원금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며 “미국에 글로벌 기업의 투자 유치 기회를 빼앗기면 앞으로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바라봤다.
유럽연합의 친환경산업 지원 펀드와 관련한 지원 규모 등 내용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도체공장 지원 계획과 마찬가지로 전기차 및 배터리공장을 유럽 국가에 건설하는 기업에 상당한 규모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될 공산이 크다.
세계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 치열한 보조금 경쟁에 수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법인 건물. |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삼성SDI 등 기업은 모두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기대하고 미국 내 생산공장 건설에 대규모 투자를 벌이고 있다. SK하이닉스도 미국에 반도체 공급망 관련한 투자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은 인건비 등 공장 운영에 필요한 비용 부담이 크지만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을 받는다면 이런 영향을 상당 부분 상쇄하고 현지 고객사 확보 및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미국과 같이 강력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유럽에 반도체공장 신규 투자 계획을 본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미 헝가리 등 유럽 국가에서 전기차 배터리공장을 운영하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삼성SDI 등 한국 배터리 3사도 유럽연합의 지원을 기대하고 현지에 투자 확대를 추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결국 한국기업들이 글로벌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시장에서 갖춘 중요성을 앞세워 미국과 유럽에서 모두 지원을 받으며 단기간에 투자를 크게 늘려 시장 지배력을 더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는 셈이다.
반면 미국에 맞서 유럽이 정책적 대응에 나서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강화해 오히려 한국기업들이 더 큰 부담을 느끼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금을 받는 기업의 중국 투자를 제한하거나 전기차 및 배터리 보조금에 주요 부품과 소재를 중국이나 러시아 이외 국가에서 수급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자국의 이익을 고려한 정책을 펴고 있다.
유럽연합이 이와 마찬가지로 반도체 및 전기차, 배터리 투자 지원에 엄격한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 투자를 결정한 기업에만 이익을 주는 쪽으로 압박을 강화한다면 한국기업들은 실익이 크지 않아도 유럽에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중국 차이나데일리는 “미국과 유럽의 보조금 경쟁은 세계 무역시장이 더 파편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며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가 이들의 경쟁에 무조건적인 수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바라봤다.
한국 주요 기업이 오히려 미국과 유럽 등 강대국 중심 세력의 한가운데 놓여 이들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취약한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글로벌타임스는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주요 국가가 협력을 통해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며 보조금 경쟁에 맞서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