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호정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2015년에 저서 '탄소전쟁'을 통해 기후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벌어질 국제사회의 경제 주도권 다툼을 풀어낸 바 있다. RE100,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선진국의 탄소장벽이 거세게 한국의 경제를 압박하는 지금, 비즈니스포스트는 고려대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나 탄소전쟁에서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과거의 무역장벽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이제는 탄소가 무역장벽을 세우는 효과적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의 대명사 '탄소'가 최근 외교, 무역 현장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탄소 감축을 명분으로 벌어지고 있는 무역전쟁, ‘탄소전쟁’ 때문이다.
박호정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2015년 동명의 저서를 통해 기후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벌어질 국제사회의 경제 주도권 다툼을 풀어낸 바 있다.
RE100(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선진국의 탄소장벽이 거세게 한국의 경제를 압박하는 지금, 탄소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비즈니스포스트는 고려대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나 탄소전쟁에서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그는 "중국이 탄소전쟁에 대응하면서 순식간에 한국 이상의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2015년에 저서 ‘탄소전쟁’을 통해 탄소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고 예견했다. 7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탄소전쟁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나
“현재의 탄소전쟁은 과거와 분명히 다르다. 과거에는 저탄소 경제로 가는 경쟁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인 무역전쟁이 됐다. 탄소전쟁은 훨씬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선진국이 신흥국을 견제하기 위한 과거의 무역장벽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는 탄소가 무역장벽을 세우는 효과적 수단으로 떠올랐다.
선진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저탄소 기술을 확보하고 있어 신흥국과 비교하면 준비가 돼 있는 데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명분도 있다. 결국 탄소만큼 무역장벽을 치기에 매력적 수단이 없는 셈이다.
문제는 선진국이 세우는 무역장벽에 우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세(CBAM)가 대표적 예다.”
탄소국경조정세가 왜 무역장벽이 되는지 알려면 먼저 '탄소누출' 개념을 알아야 한다. 유럽과 미국이 타국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근거가 탄소누출이기 때문이다.
탄소누출(carbon leakage)은 말 그대로 탄소가 다른 곳에서 새어나오는 걸 뜻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이 탄소배출 기준을 강화하면 유럽의 철강기업은 그걸 피하려 유럽연합 바깥 국가로 생산 기반을 옮길 것이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탄소배출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게 생산된 철강은 유럽으로도 수입돼 쓰이게 된다. 이것이 탄소누출이다.
그래서 탄소국경조정세가 만들어졌다. 유럽연합으로 수입되는 제품의 탄소 배출량이 기준치를 넘어서면 그에 대해 탄소가격을 부과해 징수하는 관세다. 가격은 유럽의 탄소배출권거래제(ETS)에 연동해 정해진다.
이 제도는 내년부터 시범 시행을 시작한다. 당장 유럽 수출품 중 탄소 집약도가 높은 철강, 석유화학 같은 제품들은 원가 부담이 높아진다. 생산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거나 판매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
2024년 본격 시행 땐 규제 대상은 더 많아지고, 규제 범위는 더 넓어진다. 올해 6월 올라간 유럽연합 의회 상정안은 철강 제품 외 유기화학과 플라스틱 등 품목을 늘렸다. 또 탄소 배출량 산정 범위에 전기, 즉 간접 배출을 넣었다.
탄소 배출에 지출해야하는 비용이 생기면 공정 과정에서 탄소가 많이 나오는 제품은 시장 경쟁력이 낮아진다. 반대로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제품의 경쟁력은 높아진다.
유럽은 1석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유럽 본토 산업의 가격 경쟁력은 높아지고, 탄소관세로 재정수입은 늘어난다. 탄소누출을 막을 수 있으니 국제사회에서 기후 관련 발언에서 주도권도 얻을 수 있다.
반면 탄소배출이 많은 산업을 주력산업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은 뒤로 처지게 된다. 주로 중국,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등 산업화 후발주자들이다.
'탄소 순수출국'으로 분류되는 이 나라들은 주로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탄소 다배출업종이 주력산업이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다. 한국도 그 중 한 곳이다.
산업연구원의 2021년 분석에 따르면 탄소국경조정세 시행시 알루미늄산업에서는 0.8%, 및 철강산업에서는 1%의 관세가 부과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수출 감소 효과는 각각 2.3%, 2.2%가 나타난다. 시멘트 및 비료산업의 수출 감소 효과는 0.3%로 나타난다.
▲ 주요국의 수출에 내재된 탄소 배출량 (2005~2015년). <산업연구원> |
- 탄소전쟁이 더욱 격화된다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곳은 어느 부문일까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서는 반도체와 철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반도체는 미국이 단순히 자국 내 산업화 측면이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철강도 정말 준비를 잘해야 한다.
유럽은 이미 상당수의 제철소 고로를 전기로 전환했고 그 다음 단계인 수소 제철로까지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중국은 순식간에 다른 나라들을 치고 올라갈 잠재력이 있다.”
- 한국의 경쟁력을 다른 나라와 비교한다면
“중국은 탄소전쟁에 대응하면서 순식간에 한국 이상의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다.
국토가 넓고 유휴부지가 많아 신재생에너지 인프라 마련에 유리하다.
정치체제 역시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는 속도를 내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이미 태양광 관련해서는 중국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 않나.
중국이 태양광 외에도 풍력, 양수발전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해 나간다면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나 미국의 청정경쟁법안에서 한국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한국 제품들의 탄소경쟁력이 중국 제품보다 높다. 철강이 한 예다. 산업연구원이 2021년 유럽에 수출되는 각국 철강을 분석한 결과 중국 철강에 내재된 탄소 배출량은 한국의 1.5배 수준이었다. 탄소관세가 부과되면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진다.
하지만 중국의 대응속도는 매우 빠르다. 중국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한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중국의 탄소배출권거래제는 2013년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시행 후 2021년 7월 국가 단위로 확대됐는데, 그 사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탄소시장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이미 재생에너지 공급 측면에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중국의 신재생에너지 설치 용량은 세계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풍력, 태양광, 수력, 바이오매스 설치용량 면에선 세계 1위 규모다.
중국 정부는 이 밖에도 '녹색성장' 정책을 내놓고 있다. 박재현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중국사무소장의 '중국전문가포럼' 기고문에 따르면, 중국은 전통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촉진하고 탄소중립 관련 기술 개발과 제품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또 유럽연합의 탄소배출권거래제도를 벤치마킹해 온실가스 배출업종의 범위와 온실가스 종류를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 박호정 고려대 교수는 선진국 정치권에서 탄소 문제가 정치권의 이념적 성향을 떠나 경제 주도권 확보 등에 사용하기 좋은 수단인 만큼 앞으로 탄소전쟁 양상이 완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바라봤다. <비즈니스포스트> |
- 에너지 위기, 주요국 정권 교체 와중에 탄소전쟁이 약화될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최근 유럽의 우경화 등 서구 정치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도 탄소 문제는 좌우를 떠나 정치권이 가장 이용하기 쉬운 수단이다.
미국을 보면 민주당 입장에서는 기후대응이라는 측면에서, 공화당 입장에서는 자국 내 철강산업 보호라는 측면에서 탄소 관련 규제를 활용할 유인이 있다.
게다가 탄소전쟁이 서구권에서 세계 경제질서의 우위를 차지하려 활용하는 수단이라는 측면을 바라보면 앞으로 약화될 가능성은 더더욱 적다고 본다.
서구권은 탄소 관련 무역 규제에서 환경보다는 경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의 속내는 생물다양성과 관련된 상반된 태도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생물다양성은 기후변화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서 'E' 즉 환경 이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생물의 종다양성 관련 지침을 담은 나고야 의정서에 따르면 생물자원 보유국은 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현재 선진국 중에선 호주만 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생물다양성 측면에서는 선진국이 저개발국에 비해 비교우위가 없다.
다시 말해 선진국이 비교우위를 지니지 않은 이슈는 ESG 등 금융, 무역 시장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다소 음모론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결국 환경을 내세우며 탄소전쟁을 벌이는 것은 돈을 둘러싼 경쟁이라는 의미다.”
- 탄소배출권 가격도 계속 올라갈까
“탄소배출권 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2030년 국가 온실가스감축 목표(NDC)가 상향되면서 탄소배출권의 유상할당 폭 역시 증가할 것이다. 업종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10% 정도 늘어날 것으로 본다.
자발적 배출권 시장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항공 쪽에서는 한국도 포함된 ‘코르시아(CORSIA,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가 채택한 항공사 탄소배출권거래 시스템)’에 따라 탄소 감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아람코 등이 항공유에서의 탄소배출 상쇄를 위해 배출권 시장에 뛰어 들고 있기도 하다.
결국 탄소배출권의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 갈 것이고 가격 상승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잠깐 유럽에서 탄소배출권 가격이 하락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상승 흐름을 보일 것이다.”
- 격화되는 탄소전쟁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내가 성장론자는 아니지만 결국 성장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후위기는 반드시 온다. 많은 국가가 아등바등 탄소 배출을 줄인다 해도 중국, 인도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고려해 보면 파리협정의 1.5도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다.
온실가스는 100여 년 넘는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것이다. 대응책 마련도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과 병행하면서 자본을 축적해 가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마련되는 탄소전쟁 관련 대응책은 감축 위주다. 적응이 빠져 있다.
가령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내걸었던 ‘더 나은 재건(BBB)’ 법안과 이후 마련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보면 기후 인프라 구축에 투자를 확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력 그리드는 물론 송전선, 인터넷망, 항만, 도로 등 미국의 주요 인프라를 신재생에너지에 맡는 분산형으로 구축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미국 내 노동력, 자본을 통해 이뤄진다.
한국에서도 이같이 자국 경제의 선순환을 이끌면서 에너지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에너지 정책 등 탈탄소 대응을 놓고 다분히 명분에 많이 집착하는 걸로 보인다.” 이경숙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