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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대한항공이 15년 무사고를 기록했다. 1999년 이후로 단 한 건의 인명사고도 내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1997년 괌 추락사고 이후에도 항공사고가 계속 일어나자 1999년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경영진 30여 명이 대거 사퇴하는 일을 겪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그때 대한항공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양호 회장은 그때부터 그룹의 사활을 걸고 안전에 매달렸다. 15년 무사고 기록을 만든 일등공신인 셈이다.
항공기 사고가 잇따랐던 1990년대 말 대한항공의 항공보험료는 1억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10분의 1 수준인 1200만 달러로 줄었다. 매출액 기준 세계에서 가장 값싼 수준으로 싱가포르항공과 비슷한 보험료다.
◆ ‘무사고 15년’의 의미
항공업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평을 듣는 항공사는 호주의 국영항공사 콴타스항공이다. 이 항공사는 1951년 이래 단 한 번도 인명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 1941년부터 운항을 시작한 필리핀항공도 70년 넘게 국제선에서 단 한 건의 인명사고도 없었다. 싱가포르항공도 27년 가까이 사고가 없었지만 지난 2000년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비하면 대한항공의 무사고 15년은 대단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1983년부터 1999년까지 16년 동안 사망자 687명을 냈다. 그리고 1999년부터 2014년까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비약적 발전인 셈이다.
특히 대한항공은 무사고 15년 기록으로 아시아나항공과 벌이는 안전성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두 항공사는 1999년 대한항공의 화물기 사고를 마지막으로 함께 무사고 기록을 이어갔다.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두 항공사의 대결은 2011년부터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시아나항공은 2011년 2명이 숨지는 인명사고를 일으킨 데 이어 지난해 샌프란시스코에서 3명이 숨지는 사고도 일으켰다.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한 항공기는 83대, 대한항공은 148대다. 보유한 항공기 수는 대한항공이 훨씬 많지만 1999년 이후에 일어난 사고는 모두 아시아나항공에서 일어났다.
대한항공의 변화는 국제적 위상에서도 드러난다. 대한항공에 대한 항공 관련 조사기관의 평가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매년 다양한 조사기관에서 항공사의 안전도 순위를 발표한다. 전 세계 450여 개 항공사가 각기 보유하고 있는 비행기 수나 취항 노선 수가 다른 탓에 항공사의 안전도를 사고 횟수로 단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조사기관들은 사고 발생 건수, 사망자 수, 결항이나 기체 손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안전순위를 매긴다.
한 때 우리나라 항공사는 국제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2011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있는 항공안전 관련기구로 꼽히는 항공사고조사국(JACDEC)이 발표한 대한항공 안전도 순위는 55위였다. 1999년 이후 대형 인명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1997년 괌 추락사고 등 대형 참사를 겪은 전력이 영향을 미쳤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항공사 안전 순위는 지난 1월 발표됐다. 글로벌 항공사 평가 사이트인 에어라인레이팅(AirlineRating.com)이 전 세계 448개 항공사를 대상으로 안전도를 평가했다.
이 평가에서 137개의 항공사가 안전도 부문에서 최고 등급인 별 7개를 받았다. 대한항공 역시 별 7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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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정비사들이 항공기 정비를 하고 있다.<뉴시스> |
◆ 조양호의 절치부심
대한항공 무사고 기록은 조양호 회장이 노력한 결과다.
조 회장은 1999년 잦은 항공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고 대한항공 사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한항공을 향해 “잘못된 오너경영의 표본적 케이스”라고 질타한 데 따른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대한항공이 지나치게 성장위주의 경영을 하고 인명안전 경영은 하지 않는 등 경영방식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조중훈 당시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해 오너 일가가 퇴진했다. 조양호 회장도 대한항공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신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대한항공은 1997년 22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괌 추락 사고 이후에도 2년 동안 무려 5건의 사고를 냈다. 이 때문에 대한항공과 동맹을 맺고 있던 미국 델타항공과 프랑스 에어프랑스가 좌석 공유를 거부해 일시적으로 제휴가 끊겼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미군에게 대한항공을 타지 못하게 했다.
조 회장은 절치부심하며 안전 강화에 나섰다. 2000년 부사장급의 외국인 안전담당 임원을 영입해 안전 업무에 대한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했다. 조종은 물론이고 정비에서 운항까지 철저히 안전규정을 지키도록 했다.
특히 괌 사고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된 의사소통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썼다. 괌 사고 당시 기장이 고도를 잘못 파악했지만 기장과 부기장 간의 계급적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부기장이 이를 제시간에 바로잡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사고원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조종사들에게 영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존댓말이 없는 영어가 기장과 부기장의 의사소통에서 권위의식을 없앨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50명이 반발해 대한항공을 떠났다. 지금도 대한항공의 젊은 부기장들은 필요시 기장에게 의사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있다.
기업문화도 바꾸기 시작했다. 과거 대한항공 조종사들 사이에 한 번에 착륙을 못하고 재착륙을 시도하면 실력 없는 조종사라고 인식하는 문화가 있었다. 대한항공은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방침 아래 재착륙에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무리한 착륙에 강한 처벌을 내렸다.
그 결과 조종사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조종사들 사이에서 사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면 재착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조종사 선발기준도 강화했다. 대한항공의 조종사 선발기준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아시아나항공은 비행시간 250시간을 채우면 되지만 대한항공은 1천 시간을 채워야한다. 입사 후에도 제주도에 있는 자체비행장에서 4개월 동안 조종훈련을 받는다.
정식 기장이 돼도 조종훈련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전 세계 항공사 중 자체비행장을 보유해 훈련하는 곳은 대한항공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항공이 자랑하는 종합통제센터도 조 회장의 작품이다. 조 회장은 델타항공의 비행통제본부를 방문한 직후 델타항공처럼 실시간으로 모든 비행기를 모니터할 수 있는 통제센터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 뒤 5천억 원 이상을 투자해 종합통제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은 운항, 탑재, 기상 등 항공기 운항과 관련된 각 분야 전문가 140여 명이 24시간 근무해 '잠들지 않는 지상의 조종실'이라고 불린다.
조 회장의 지시로 외국인도 많이 늘었다. 안전담당 부서장은 항상 외국인 차지다. 대한항공 내 모든 조종사 평가는 외국인이 하고 있다. 한국인 선배들이 하면 학연, 지연이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비 분야에도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연간 총 비용 11조 원 가운데 정비 분야에만 1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고유가로 인한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안전장려금 480억 원을 전 직원에게 지급했다. 회사 여건이 어려워도 안전장려금은 꼭 약속대로 지급해야 된다는 조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