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가운데)이 다른 경제단체장들과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부총리-경제단체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재계가 재벌 사면론에 군불을 지피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사면의 주인공이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나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더 활발히 뛸 수 있도록 현재 해외 출입국에 제약을 받는 등 기업활동에 불편 겪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같은 기업인들의 사면도 적극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발언부터 사면을 꺼냈을 정도로 두 재벌 총수의 사면이 재계의 주요 관심사라는 얘기다.
재계가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런 기조를 보이는 배경에는 윤석열 정부가 친기업을 강조하는 만큼 ‘명분’만 충분히 제공하면 사면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계가 간곡하게 요청하니 정부로서는 이를 외면할 수 없다고 발표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재계에서는 정권 교체기부터 이들의 사면을 줄곧 요청해왔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이른바 경제 5단체는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을 2주 정도 앞둔 4월25일 ‘경제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한 사면복권 청원서’를 청와대와 법무부에 제출했다.
이들은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등 15명가량의 사면을 요청하면서 “사회통합이 절실한 위기 상황에서 과거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는 인사에 사면복권을 통해 치유와 통합의 정치를 펼쳐주기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요청이든 논리는 필요하다. 논리가 부족한 주장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재계가 말하는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사면론의 핵심은 ‘기업인의 발에 달린 족쇄를 풀어 해외 현장경영과 인수합병 등에 자유롭게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에게 달려있다는 '족쇄'가 실제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뇌물공여 혐의로 2021년 1월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치소에 있다가 같은해 8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에 따라 취업제한을 받고 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여러 계열사에서 책임 있는 직책을 하나도 맡지 않고 있다.
▲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사장단 회의 성격을 지닌 VCM미팅을 주관하고 있는 모습. <롯데그룹> |
반면
신동빈 회장은 다르다.
신 회장은 2019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됐다. 집행유예로 취업제한 조치는 따로 받지 않았다.
실제로 신 회장은 롯데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는 롯데지주와 롯데제과, 롯데케미칼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계열사 에프알엘코리아의 기타비상무이사와 캐논코리아의 사내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롯데지주 사업보고서 등을 보면 신 회장은 해외 출장으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사회에 참석해 회사의 굵직한 의사결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옛 사장단회의 성격을 지닌 VCM미팅을 주관하며 그룹 내부 분위기를 다잡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하는 사람도 바로 신 회장이다.
최근 바이오사업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직접 미국 제약공장을 방문해 둘러보기도 했다.
재계의 주장대로 신 회장에게 족쇄가 달려있다고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일각에서는 ‘
신동빈 회장이 집행유예 기간인 까닭에 법적 리스크로 경영 보폭을 넓히는 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법적 리스크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인들이 집행유예를 받으면 외부활동에 제약을 받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법만 잘 지키면 문제가 없다.
재계가 ‘혹시나 위법한 경영활동을 할 수도 있으니 이를 감안해 미리 사면을 해달라’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논리다.
백 번 양보해 신 회장이 사면을 받지 못해 롯데그룹이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지 물어봐도 적절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롯데그룹의 투자는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 1년 동안 12건이 넘는 인수합병에 1조 원을 넘게 투자했다. 새 성장동력으로 꼽은 바이오와 헬스케어사업 진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조직문화를 혁신하는 것 역시 매우 빠르다.
신 회장은 2021년 11월 말 실시한 롯데그룹 정기 임원인사에서 외부 인재를 대거 수혈했다. 롯데그룹의 심장과도 같은 롯데쇼핑 대표이사에 회사 창립 이래 최초로 외부 인물을 발탁했다. 롯데쇼핑에서도 핵심인 롯데백화점의 수장에 라이벌인 신세계그룹 출신 인사를 선임했다.
▲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가운데)이 2017년 10월5일 국정농단 사건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안양 서울구치소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신 회장이 변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롯데그룹이 ‘뉴 롯데’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평가가 수두룩하다.
신 회장의 사면론에 군불을 지피는 재계의 주장이 불편한 이유가 있다.
기업인이 저지른 대형 범죄에도 줄곧 ‘투자 활성화’를 이유로 죄를 사면해줬던 과거를 답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실제로 앞선 정부들은 위법한 행위로 유죄 선고를 받은 재벌들을 놓고 ‘국가의 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쉽게 사면해줬다.
하지만 이들이 사면된 이후 국가 경제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수 있는 공식적인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면을 바랄 때는 ‘반성하겠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수년 뒤에 비슷한 죄를 지어 법정에 다시 서는 재벌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롯데지주는 과거 신 회장이 대법원에서 집행유예 확정판결을 받을 때 입장문을 내고 “그동안 큰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많은 분들의 염려와 걱정을 겸허히 새기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 신뢰받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더 필요하지 않다. 신뢰받는 기업이 되겠다고 했고 노력하겠다고 했으니 그만이다. 앞으로 법만 지킨다면 따로 수사를 받지도 않을 테고 경영활동에 제한도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법대로만 하면 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보다는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말을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만 정의롭다는 신념은 있다.
재벌을 위한 '원포인트' 사면을 둘러싸고 여론을 떠보는 재계의 행태를 더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롯데그룹이 사면론을 놓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자.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