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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2014년 시무식’을 마치고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이날 정 회장은 ‘역량 강화를 통한 미래성장 기반 강화’와 ‘글로벌 자동차 판매목표를 786만대로 확정’하는 경영방침을 밝혔다. |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가 미국에서 터진 ‘연비과장’ 사태를 보고 받았다. 정 회장은 격노했다. 정 회장은 귀국 직후 사장급 인사를 경질했다. 2012년 11월 일어난 일이다.
그로부터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현대차 싼타페가 연비를 부풀렸다는 국토교통부의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는 그동안 ‘안티 현대차’가 높아지는 것을 고려해 몸낮추기를 해왔다.
김충호 현대차 사장은 지난 5월 부산국제모터쇼 미디어 행사에서 “모든 임직원은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열린 마음과 겸허한 자세로 소중한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며 “국민기업으로 아직 부족하지만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기본으로부터 혁신을 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몽구 회장도 지난 3월 수출확대전략회의에서 “현대기아차가 내수시장에서 수입차에 밀린다면 해외시장에서 부진도 불 보듯 뻔한 일”이라며 “국내 소비자들이 다시 현대차를 선택하도록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신차를 내놓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싼타페 연비 부풀리기 판정은 이런 현대차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는 싼타페의 연비 부풀리기를 발표하면서 보상에 대한 공을 현대차에게 넘겼다. 일부 소비자들은 벌써부터 피해보상 소송을 진행중이다.
현대차는 국내 소비자를 봉으로 여긴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연비 부풀리기에 대응하는 현대차의 자세는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현대차가 그동안 보여왔던 몸낮추기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들은 연비 부풀리기에 대한 현대차의 대처가 ‘국민기업’으로 거듭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몸낮추기가 ‘악어의 눈물’에 불과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보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 북미에서 5천억 배상하고 ‘진심으로 사과’
현대차는 세계 자동차의 경연장인 북미 시장에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이는 북미에서 연비 부풀리기와 관련해 집단소송을 받았을 때 현대차의 대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에서 2012년 11월 현대차 연비 부풀리기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현대차와 기아차 중 2011~2013년식 13개 모델에 대해 연비가 과장됐다고 밝혔다.
13개 차종은 현대차의 엘란트라 소나타 액센트 그랜저 제네시스 투싼 벨로스터와 기아차의 쏘렌토 리오 쏘울 스포티지 옵티마다. 연비과장은 약 0.4~0.8㎞/ℓ로 나타났다.
미국 소비자들은 민사소송을 연이어 제기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 법원으로부터 소비자 90만 명에게 4200억 원 상당의 금액을 배상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캐나다에서도 지난 1월 집단 민사소송을 당했다. 현대차는 캐나다에서 680억 원 가량을 지급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연비 부풀리기에 대해 5천억 원 가량을 북미 구매자들에게 배상한 셈이다.
현대차가 연비 부풀리기에 대응한 태도도 그동안 국내에서 보여준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현대차는 사태가 터지자 즉각 현지 판매법인들과 화상회의를 열어 현황과 보상계획을 설명하며 협조를 당부했다. 또 다음날에는 미국 주요 언론에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광고도 실었다.
업계에서 현대차가 ‘도요타 리콜 사태’와 같이 늑장대응해 세계시장에서 극심한 부진에 빠졌던 전례를 밟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풀이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당시 “보상금은 실적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며 “다만 브랜드 이미지 타격으로 판매량 급감을 시장에서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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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원(오른쪽) 국무총리가 지난해 11월 ‘신형 제네시스’ 출시 행사에 참석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
◆ 현대차 국내에서는 묵묵부답, 포드와 대비
북미발 연비사태로 국내에서도 연비과장 논란이 일었지만 현대차는 법규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연비보상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번 싼타페 ‘부적합’ 판정결과도 매출의 1000분의 1 수준인 10억 원의 과징금만 내면 된다.
현대차는 국토부가 싼타페 연비 부풀리기를 발표한 지난 26일 “정부부처의 상이한 결론 발표에 대해 매우 혼란스럽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현대차의 입장을 충분히 소명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는 “고객들에게 혼선을 초래하게 돼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향후 연비보상에 대해서도 소극적 입장을 밝혔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 보상을 할지 말지는 면밀히 검토한 후에 결정하겠다”며 원론적 답변만 내놓았다.
현대차의 이런 태도는 같이 연비 부풀리기 판정을 받은 쌍용차에도 영향을 끼쳤다. 쌍용차 관계자는 “현대차도 보상은 공식입장 자료에 안 들어가 있더라”며 “우리도 아직 거기까진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현대차에 적극적 보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서울YMCA는 논평을 내 “피해 소비자들이 소송에 나서기 전에 제조사가 먼저 조사결과에 상응하는 소비자 보상대책을 마련하고 이를 성실히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현대차 일부 소비자들은 연비 부풀리기로 법원에 소송을 낸 상황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5건의 소송 중에서 이미 2건이 패소했다.
소비자들은 “표시연비가 실제연비보다 높게 표시된 것은 과장광고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광고에 ‘표시연비와 실제연비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문구가 있고 연비측정 기준이 도심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현대차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번에 국토부 검증에서 연비 부풀리기를 한 것으로 결론이 난 만큼 앞으로 소송에서 소비자가 아길 가능성이 커졌다. 한 변호사는 “종전과 다른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싼타페 구매자 소송단을 더 모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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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런 멀러리 포드 CEO |
이런 현대차의 태도는 국내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완성차업체와 뚜렷이 대비된다. 외국 완성차업체들은 적극적으로 보상에 나서고 있다. 특히 이번에 미국의 포드 자동차가 내놓은 연비 부풀리기에 대한 보상조처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포드는 최근 링컨MKZ하이브리드와 퓨전하이브리드 등 자사 6개 차종의 연비를 최대 16% 부풀린 사실을 인정했다. 실험실에서 연비를 측정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다며 자발적으로 보상계획을 밝혔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팔린 2013∼2014년형 자동차 21만대 가량을 모두 보상하겠다고 했다.
연비 부풀리기에 대한 소비자 보상은 미국에서도 법적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포드는 국내에서 연비 부풀리기 대상차량에 대해 150만 원에서 270만 원 상당을 보상하겠다고 했다. 포드의 앨런 멀러리 CEO는 이와 관련해 성명을 내 "고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프로세스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자동차 제조사가 연비 부풀리기에 대해 보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첫 보상사례를 현대차가 아닌 미국 완성차업체가 만든 것이다.
소비자단체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가 국민기업이 되려면 좋은 차를 팔아야 하지만 실수에 대해서도 솔직히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그동안 현대차는 숱하게 연비 부풀리기 논란에 휩싸여 왔는데 소비자에 대한 보상 선례를 수입차에 내준 것이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