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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노무현을 정치로 이끌고 노무현이 정치로 데려오다
홍지용 기자 hjy1120@businesspost.co.kr 2014-05-15 13: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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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강제징집되어 1978년 육군 특전사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생활했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상임이사 및 이사장을 맡았다.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 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으로 제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소속돼 활동중이다.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총득표율 45.3%로 41.8%를 얻은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당대표에 올랐다.

2016년 1월27일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5년 2월8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채 1년이 못되는 354일만이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천주교 세례명은 디모테오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사탕과 과일을 준 수녀들에게 감화되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재인의 가족은 가난했고 학교 위 ‘신선성당’에서 자주 배급을 받을 정도였다.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가난 때문에 수차례 방황했고, 중고등학생 시절 술•담배에 손을 대며 총 4차례 정학 처분을 받아서 생긴 별명이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청와대 시절에도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로 사용할 정도로 공손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리원칙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자리도 갖지 않았고, 청와대 내 PK 인맥을 대표했지만 경남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그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기간이 길어, ‘친노의 수장’,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대선패배 요인으로 캐릭터 정립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었다. .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너무 빨리 정치 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0년 제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고승덕, 박원순, 조영래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82년 사법연수원(12기)을 차석으로 수료했다. 원래 성적은 수석이었으나, 시위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순위가 바뀌었으며 본인이 희망했던 판사임용에도 실패했다.

‘법률가는 억울한 서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했다.


그 해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재야에서도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 모임을 창립하고 대표를 맡았다. 또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 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의 대표도 역임했다.


1987년 노무현과 함께 4•13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었다. 대우조선 사건이 일어나 노무현이 구속되자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그를 변호했다. 1988년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거절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해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인권변호사로 일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 및 부산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하자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제의를 수용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2007년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으며, 이후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8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지지선언 후 사퇴하는 등 범야권의 지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이며 제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이다.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총득표율 45.3%로 41.8%를 얻은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당대표에 올랐다.

2016년 1월27일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5년 2월8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채 1년이 못되는 354일만이었다.


◆ 학력


부산 남항초등학교, 경남중학교, 197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교시절 초기에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담배에도 손을 대는 등 방황했다. 심지어 중고시절 종합 네 번의 정학을 받아 ‘문제아’로도 불렸다.

대학입학에 실패해 재수했다. 1972년 4년 전액장학금을 약속한 경희대학교 법학과(당시 법률학과)에 문과 수석으로 입학했다.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당했다. 1978년 군 제대 후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체포구금된 상태에서 제22회 사법시험 합격을 통보받았으며 그 해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친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원래 흥남시청에서 농업계장, 농업과장으로 근무했으나 한국전쟁 시기 아내 강한옥과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남하해 문재인을 낳았다.

문재인은 2남 3녀 중 장남이다. 누나 문재월와 여동생 문재성은 주부이고, 남동생 문재익은 원양어선 선장이다. 막내 여동생 문재실은 모친 강한옥을 모시고 부산 영도에서 살고 있다.


1981년 대학교 2년 후배인 김정숙과 결혼해 슬하에 1남(문준용) 1녀(문다혜)를 두었다. 문준용은 2011년 광주비엔날레에 <마쿠로쿠로스케 테이블>이라는 작품을 출품한 미디어아티스트이며, 문다혜는 주부다.


문재인의 처가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장인과 장모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으며, 문재인 결혼 당시에 강화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 상훈


특전사 복무 기간 사령관 정병주와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폭파과정, 화생방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재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 상훈


특전사 복무 기간 사령관 정병주와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폭파과정, 화생방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재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어록


“법률가는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며)


“정치에 뜻이 없다.” (2002년 6•13 지방선거 때 노무현이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 정치 쪽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펼치고자 하는 새정치, 여러가지 개혁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부족한 부분이나마 참여하기로 했다.”


"노 당선자에게 이제 빚을 갚고 싶다." "정치를 잘 모르며 민정과 사정, 제도개혁, 인사검증 등 중요한 민정수석의 업무를 잘 감당할지 걱정이 된다. 지금은 나서지 않고 묵묵히 배우겠다." (2003/1/23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내정된 후, ‘정치에 거리를 두다 이번에 특별히 민정수석을 맡은 계기’를 말하며)


“국정원의 국내사찰을 금지하자는 것은 국정원의 기능을 법에 따라 제 위치로 찾아주자는 것.” (2003/1/24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 장기개혁에 대해 논의하며)


"국민이 이명박 후보를 뽑을 때 도덕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는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성장률, 고용, 국가채무 규모 등 어느 하나 참여정부보다 나은 게 없다." (2011/2/11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보수층이 참여정부의 경제문제를 추궁했다는 지적에)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2011년 출간한 자서전 <운명>에서)


“40대 이후 최고의 일탈은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께) 잘 되는 모습을 조금도 보여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회한.”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아들로서 결심이었다.” (고시 결심 이유와 관련한 본인의 회고)


"내 별명 중 노무현의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 (2012/1/9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말하며)


"소수 특권층의 나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주인인 우리나라, 네 편 내 편 편가르지 않고 함께 가는 우리나라, 우리'라는 말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 "반칙과 특권이 지배하는 암울한 시대와 최악의 정부가 나를 정치로 불러냈다." “시민과 동행하는 정치로 반드시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를 이뤄내겠다.” (2012/6/17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제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


“참여정부에 있으면서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봤고, 그때의 경험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 그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2012/9/14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초청 토론에서 손학규 후보가 정치경험 부족에 대해 언급하자)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진실규명을 빨리 끝내고 소모적 논란과 정쟁에서 벗어나 정치가 민생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 (2013/10/10 노무현 정부 NLL 회의록 논란에 대해 검찰이 당시 실무자들을 소환하자)


"안녕하지 못한 정치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그 분이 죽음으로 말하려던 뜻이 아프게 와 닿는다." (2014/1/3 국정원 대선개입 특검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분신한 이남종씨의 빈소를 조문하여)


"새누리당이란 절대강자가 있는 상황에서 약한 정파들끼리의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2014/1/28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지방선거의 야권연대에 대해)


“세월호만 침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이 침몰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침몰했다고 생각합니다.” (2014/5/4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을 방문하여)


“민주주의, 서민경제, 계속 파탄낸다면 저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할 것입니다.” (2015/2/8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당대표 수락연설)


◆ 평가


천주교 세례명은 디모테오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사탕과 과일을 준 수녀들에게 감화되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재인의 가족은 가난했고 학교 위 ‘신선성당’에서 자주 배급을 받을 정도였다.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가난 때문에 수차례 방황했고, 중고등학생 시절 술•담배에 손을 대며 총 4차례 정학 처분을 받아서 생긴 별명이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청와대 시절에도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로 사용할 정도로 공손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리원칙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자리도 갖지 않았고, 청와대 내 PK 인맥을 대표했지만 경남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그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기간이 길어, ‘친노의 수장’,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대선패배 요인으로 캐릭터 정립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었다. .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너무 빨리 정치 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 기타


산을 좋아한다. 노 전 대통령 탄핵으로 중간에 돌아왔지만 2004년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 두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떠났다. 당시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신문으로 소식을 듣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부인 김정숙과 인연은 학생운동에서 시작했다. 시위도중 문재인이 최루가스를 맡고 실신했을 때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이 계기가 됐다. 김정숙은 군대에 있는 문재인을 처음 면회할 때 남들 다 들고오는 통닭 대신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수석’이란 단어와 인연이 깊다. 1968년 당시 ‘한강 이남 최고의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재수에 나선 1971년 종로학원 진입시험에서도 1등을 했다. 사법연수원에서 차석 졸업했지만, 이는 과거 학생운동 전력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도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맡았다.


문재인 군복무 시기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 문용형은 당시 대표적 저항잡지인 ‘사상계’를 읽고 이웃 대학생에게 한일회담 반대이유를 설명하는 등 사회의식이 깊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고시를 시작한 것은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제대 후 복학의 길은 막혀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49재를 마친 다음날부터 전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한 후 부산으로 내려간 것은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에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인도한 장본인이다. 1988년 김영삼 측으로부터 정치참여 요청을 받은 그는 "정치인 자질은 노무현 씨가 훨씬 더 탁월하다"며 노무현을 추천했고 노무현은 이를 거듭 피하다 결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문재인은 그 후 노무현이 흔들릴 때마다 "정치를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애걸반, 압박반 주문해 왔다고 한다. 노무현이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며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변호인인 문재인에게 권유했을 때 문재인이 수락한 것은 그러한 사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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