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삼성그룹과 엘리엣매니지먼트의 전투가 확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삼성물산 이해 관계자들이 속속 이번 전투에 참전하고 있다.
제일모직 2대 주주인 KCC도 삼성물산 지분을 사들이며 '백기사'로 등장했다. 합병에 반대하는 소액주주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엘리엣매니지먼트가 법적 공방에 들어가면서 이번 전쟁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특징이 있다.
이런 양상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그룹 승계구상을 뿌리채 흔들어 놓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통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며 ‘부드러운’ 경영권 승계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상관없이 이재용 부회장 경영권 승계의 정당성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 때문에 합병이 이뤄지고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으로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 삼성물산 자사주 처분으로 정면대결 선택
삼성물산은 10일 이사회를 열어 보유 중인 자사주(보통주) 899만 주(5.76%)를 오는 11일자로 KCC에 전량 처분하기로 결의했다. 처분 가액은 6743억 원이다.
KCC는 이번 지분인수로 삼성물산 지분을 모두 5.79% 확보하게 됐다. KCC는 지난 8일 약 230억 원 규모의 삼성물산 지분 0.2%를 장내에서 취득했다.
정몽진 KCC 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백기사'로 나선 셈이다.
이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 진영은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매각한 이후 계열사인 삼성SDI, 삼성화재 등 계열사와 오너 일가 지분을 합해 13.59%의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여기에 KCC 보유지분을 합하면 우호지분은 19.38%로 늘어난다.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를 매각한 것은 엘리엇메니지먼트와 표대결에 대비한 것이다. 삼성그룹은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삼성물산 합병 반대에 맞서 정면대결을 선택했다.
삼성물산은 오는 7월17일 합병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있다.
KCC는 이전에도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 지분을 확보하는 등 삼성그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KCC는 제일모직 지분 10.18%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삼성그룹이 삼성물산 자사주를 우호지분으로 만들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놓고 갈등양상은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도 공세 강도를 높이면서 세결집에 나서고 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9일 법무법인 넥서스를 통해 주주총회 결의금지 가처분 소송을 내는 초강수를 뒀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들에게도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하는 전선에 서줄 것을 요청했다.
|
|
|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 |
◆ 세대결 본격화, 참전세력도 늘어나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행보는 단기차익을 노린 것이라는 그동안의 예상을 깨고 경영권 행사를 주도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해석된다.
특히 법적 소송으로 비화할 경우 삼성물산의 임시주총 결과와 관계없이 이번 전쟁이 장기국면에 접어들 가능성도 높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행보는 삼성물산 경영권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도 “합병절차가 적법하게 진행된 만큼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가처분 소송에서 승산 가능성은 높지 않다”면서도 “소송제기만으로 또 다른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열어 놔 엘리엣매니지먼트와 삼성그룹의 갈등이 장기화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엘리엣매니지먼트의 의도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소액주주들은 이미 카페를 개설하고 엘리엇매니지먼트에 주주권리를 위임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며 세력 결집에 나섰다.
'삼성물산 소액주주 연대' 카페에 따르면 10일 오후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하며 의결권 위임 의사를 밝힌 주식은 67만여 주를 넘어섰다. 9일 오후 기준으로 약 25만7천 주에서 하루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삼성물산 전체 발행주식의 약 0.4%에 이른다.
엘리엇매니지먼트 외에도 네덜란드 연기금도 엘리엇매니지먼트와 마찬가지로 합병비율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네덜란드 연기금은 삼성물산 지분 0.35%를 보유하고 있는데 합병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삼성물산의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이재용 승계 둘러싼 ‘불편한 질문’ 수면 위로
삼성물산 합병을 둘러싼 갈등이 확전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삼성그룹은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였다.
두 회사 합병의 정당성 시비에 이어 합병비율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는가 하면 삼성그룹 전반의 의사결정 과정까지 도마 위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10일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의사를 표시한 이후 해외 주요 투자자들이 합병반대 가능성을 언급하며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손을 들어주는 상황”이라며 “이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전략이 삼성그룹을 압박하고 있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윤 연구원은 삼성물산 임시주총에서 합병이 통과되더라도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윤 연구원은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그룹과 버금가는 지분을 취득 뒤 새로운 임시 주주총회에서 이사 해임안, 중간배당, 자산양수도(삼성전자, 삼성SDS 지분매각), 순환출자 즉각 해소, 합병 주주총회 이후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 등을 제시한다면 주주총회 결과와 관계없이 삼성에게 큰 시련”이라고 분석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을 앞둔 삼성그룹이 이번 합병의 고비를 넘더라도 언제든지 또 다른 암초에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회사 합병추진에서 나타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몰두한 나머지 대형 계열사들을 합치기로 결정하면서 합병비율이나 시너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결국 주주들의 반발을 불렀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8일자 칼럼에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수익을 노린 ‘먹튀’일 가능성을 전제하면서도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삼성그룹 지배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초점이 맞춰진 합병의 ‘숨은 뜻’이 드러날 것이라며 “삼성그룹과 엘리엇매니지먼트 사이의 갈등으로 불편한 질문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도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행동주의 투자자로서 오너 지배구조의 재벌경영과 승계과정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
|
|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1일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해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 흔들리는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논평을 통해 삼성그룹의 의사결정 과정 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의 지분확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합병반대에 나선 근본 배경은 삼성그룹이 제시한 합병의 이유와 합병비율 및 주주설득 작업 등 모든 면에서 미흡했기 때문”이라며 “삼성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그룹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최근 2년 동안 일련의 사업재편을 추진하면서도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소액주주들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그룹의 사업재편은 모두 불시에 발표됐다”며 “사전 또는 사후적으로 주주들을 만나 합병과 분할의 이유와 효과 등에 대해 설명하거나 주주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단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삼성그룹은 이번 합병안을 밀어붙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삼성그룹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합병을 통해 사업 시너지를 내고 효율을 높여 회사가치를 키우는 것이 주주들을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판단해 합병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삼성물산의 자사주를 KCC에게 전격적으로 넘긴 것도 같은 의도로 보인다.
이번 전쟁에서 밀릴 경우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구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성그룹이 애초의 계획대로 이번 합병을 성공시킨다고 해도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논란이 지속된다면 오히려 이재용 부회장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치밀하게 쌓아올린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이재용 부회장의 ‘글로벌하고 스마트’한 리더십에도 흠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합병과정에서 커진 잡음이 확대재생산된다면 도리어 이재용 부회장 경영권 승계의 정당성 논란을 부를 수 있다”고 염려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