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다. CEO의 나침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은 SK그룹의 전략전문가로 손꼽힌다. 그의 나침반은 ‘탈정유’를 가리킨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정유업황이 내년에도 좋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김 대표는 전기차 배터리사업 등 비정유사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능력은 현재 1.9GWh 규모인데 내년 3.9GWh까지 늘리기로 했다.
올해 들어 전기차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유럽에서도 공격적 설비투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언제 선정이 마무리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 유럽에 공장을 새로 짓기 위해 부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올해 초 SK이노베이션 대표로 취임하면서 ‘탈정유회사’로 변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취임 후 첫 간담회에서 전기차 배터리와 화학사업을 지목하며 “이제 짧은 호황 뒤에 긴 침체가 오는 '알래스카 정유사업'을 넘어서 지속적 성장이 가능한 ‘아프리카 초원’으로 전쟁터를 옮길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배터리와 화학 등 비정유사업에 2020년까지 모두 10조 원을 투자하고 전기차 배터리부문에서는 2025년까지 세계시장 30%를 점유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삼성SDI보다 한발 늦게 배터리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기술력을 빠르게 입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니켈함량을 80%까지 확대해 주행시간을 늘린 전기차용 NCM811 배터리를 내년 3분기부터 세계 최초로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이웅범 LG화학 사장이 “우리가 더 빨리 양산할 것”이라고 받아치며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SK이노베이션은 후발주자인데도 위협적으로 배터리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특성상 국제유가와 환율 등 외부요인에 크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머지않아 석유시대가 저물기 시작할 것이란 관측까지 힘을 얻고 있다.
세계 최대의 화석연료 개발업체 중 하나인 로열더치셸이 최근 유럽의 전기차용 충전시설업체인 뉴모션을 인수하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로열더치셸은 석유 수요가 이르면 2020년대에 정점을 찍고 내려올 것으로 바라본다.
김 대표가 새 성장동력을 찾는데 다급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물론 배터리사업에도 불확실성은 남아있다.
이충재 KTB증권 연구원은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가운데 전고체배터리가 가장 주목받고 있지만 국내 전기차 배터리기업은 이 부문에서 일본, 미국 등보다 기술력이 뒤처져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SK이노베이션을 포함한 국내의 전기차 배터리 회사들은 액체전해질 리튬이온배터리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더 가볍고 작지만 에너지밀도는 더 높은 전고체 배터리가 2~3년 안에 상용화되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앞으로 연구개발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수년 뒤 배터리시장에서 SK이노베이션의 위치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안정적 판매처를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전기차 배터리시장이 현재로선 형성 초기인 만큼 누가 먼저 고객사를 많이 확보하는 지가 중요한데 SK이노베이션은 현대기아차와 중국의 BESK 말고는 아직 안정적 고객사를 확보하지 못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어떤 사업이든 변수가 있기 마련”이라며 “김 대표는 다양한 옵션을 고려해 연구개발 등에 힘쓰는 중”이라고 전했다.
김 대표는 1961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SK에너지의 전신인 유공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SK네트웍스, SK포트폴리오매니지먼트, SK물류실 등 다양한 계열사의 중장기 정책수립을 휘했다.
SK에너지 정유부문의 흑자기조를 안착한 공을 인정받아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 선임됐다. [비즈니스포스트 고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