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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환율이 1500원에 바짝 다가섰다. 과거라면 외환위기급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규모 대미 투자 확대 등 구조적 경상수지 변화를 고려하면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닌 '뉴 노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이미 환율 1500원을 기본 시나리오로 놓고 원가 구조를 재편하며 투자와 생산, 판매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는 고환율 시대가 본격화될 2026년을 앞둔 지금 정부와 기업, 투자자들이 어떤 대응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본다.
-글 싣는 순서 ①'1500원을 지켜라', 정부 '미봉책' 비판에도 국민연금으로 '환율방어' 밀어붙여 ② 고환율 고착화에 금리정책 부담 커진 한국은행, 이창용 '신3고' 부담 커진다
③ 고환율에도 웃지 못하는 수출기업, '환헷지 전략'에 따라 희비 엇갈린다
④ 삼양-김정수와 오뚜기-함영준 희비 가르는 고환율, 식품업계 비빌 언덕은 '해외'
⑤ '통합 대한항공' 높아지는 비용 압력, 조원태 코로나 이은 제2의 경영시험대
⑥ LG화학 롯데케미칼 엎친데 덮친 고환율, 투자 확대까지 빨간 불
⑦ 고환율에 배터리 3사 실적 회복 발목 잡히나, 원자재 수입 비용 폭탄 현실화
⑧ 크래프톤 올해도 연간 최대 실적 눈앞, 김창한 환율 효과까지 더해져 '훈풍'에 미소
⑨ 삼성SDS 고환율에 글로벌 물동량 변동성 확대 우려, 이준희 디지털 물류 플랫폼으로 방어
⑩ 고환율 상수 시대, 동학개미도 서학개미도 이것만 알고 투자하자
[비즈니스포스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400원 후반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환율에 통화정책 방향을 놓고 고민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이 총재는 고환율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이 경기침체 우려를 키우는 악순환 속에서 금리를 내리기도 올리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했다. 지금 상태가 이어진다면 고환율이 유발한 고물가에 기준금리까지 오르는 '신3고'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15일 증권가 분석을 종합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Fed)가 기준금리를 잇따라 인하하면서 한·미 금리격차는 좁혀졌지만 고환율 상황은 장기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여전히 우세하다.
전문가들은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해외 주식·채권투자 확대 등 외환 수급의 구조적 변화를 꼽고 있다.
연초 계엄과 같은 특이사항이 없는데도 고환율이 유지되고 있어 1400원대 환율이 사실상 새로운 기준 값으로 굳어질 것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한국은행의 내년 통화정책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 총재가 11월 금융통화위원회 뒤 기자회견에서 굳이 환율 발 물가상승 압력 우려를 반복해 언급한 것은 결국 금리 인하 사이클을 조정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며 “부동산에 이어 환율을 금리 인하가 어려운 새로운 이유로 설명한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단기간에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방향이 금리하락으로 가기 어려운 만큼 2026년 금리 동결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한국은행은 11월 금통위 이후에도 높은 환율이 물가를 비롯한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칠 부작용에 관한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내부에서도 기준금리 추가 인하가 쉽지 않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김종화 한국은행 금통위원은 최근 간담회에서 “환율이 올라가면 수입 의존도가 높은 석유화학이나 식품기업 등은 힘들어진다”며 “경제 전체로 봤을 때 고환율 상황은 정책과 시장에 여러 부정적 영향을 야기하는 만큼 어떻게 대응할지 정부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금융센터 등에 따르면 세계 주요 투자은행(IB)은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의 여파를 반영해 한국의 2026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일제히 상향조정했다.
주요 세계 투자은행 8곳의 평균 전망치는 1.9%로 집계됐다. 10월 말 1.8%에서 0.1%포인트 높아졌다.
한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최근 3개월 2%대 상승률을 지속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2025년 11월 한국 소비자물가지수는 117.20(2020년=100)으로 집계됐다. 이는 1년 전보다 2.4% 오른 수치다.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구매하거나 가격 변동에 민감한 품목들을 중심으로 산출되는 생활물가지수도 2.9% 상승했다. 식품 부문이 3.7% 올랐고 식품 이외 부문은 2.3% 높아졌다.
한국 소비자물가는 올해 8월 잠깐 1.7%대로 내려갔다가 9월(2.1%)과 10월(2.4%) 다시 2%대로 올라섰다.
수입물가지수도 오르고 있다.
1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5년 11월 수출입물가지수(잠정)’에 따르면 11월 수입물가지수는 10월보다 2.6% 상승했다. 지난해 4월(3.8%) 이후 1년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국제유가 하락에도 원/달러 환율이 상승해 수입물가지수가 올랐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1월 원/달러 환율 평균은 1457.77원으로 10월 1423.36원과 비교해 2.3% 올랐다.
문제는 정부의 노력에도 원/달러 환율이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5일 원/달러 환율은 직전 거래일보다 2.3원 오른 1476.0원에 장을 시작했다. 금융당국이 전날 주말 긴급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음에도 장 초반 상승세를 이어갔다.
12월은 원/달러 환율 평균은 이미 1470원을 넘으며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핵심 역할인 이 총재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매파적’ 기조도 이 총재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연준은 지난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지난 9월과 10월에 이어 3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인하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인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시장에서는 미국의 내년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이 12월 FOMC 이후 기존보다 낮아졌다고 보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FOMC 뒤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현재 미국은 앞으로 경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추가 인하에 신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연준이 내년 금리인하 속도조절에 나서면 이 총재의 선택지는 더욱 줄어들 수 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동결하는데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리면 한·미 금리격차가 다시 벌어지면서 원화 약세가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금리차이가 커질수록 더 높은 금리를 쫓아 국내 시장을 이탈하는 자금이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
문홍철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이번 FOMC 결과와 무관하게 연준이 현재 강달러를 유지하면서도 금리인하 속도는 천천히 가겠다는 기조를 보이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는 원/달러 환율과 국내 금융시장에 부정적 재료”라고 평가했다.
원/달러 환율은 비상계엄 여파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조치 등으로 올해 4월9일 1484.1원까지 올랐다 6월30일 1350.0원까지 떨어지면서 안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0월 들어 1400원대 위로 올라섰고 두 달 사이 1470원대까지 상승했다. 현재와 같은 고환율이 지속하면서 이로 인해 물가가 오른다면 이 총재로서는 한국은행의 최우선 정책목표인 물가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과 마주할 수 있다는 우려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이 총재는 11월 금통위 이후 “금리동결 의견을 낸 금통위원 3명은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고 물가 우려가 증대된 만큼 당분간 금리를 동결해야 한다고 봤다”며 “환율이 높은 변동성을 지속하고 있어 물가와 시장에 미칠 영향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