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재명 대통령이 11월19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 중에 아부다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UAE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4일(현지시각) 한미 통상협상 합의에 따라 관세 인하를 연방 관보에 공식 게재했다. 이로써 한국산 자동차에 적용되는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아졌다.
현대차그룹은 4일 입장문을 통해 “국내 경제 활성화와 한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겠다”며 정부와 국회에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 관세 부과로 우리 정부와 기업은 말 그대로 온갖 고생을 했다. 대통령실이 직접 발벗고 나섰고,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문턱이 닳도록 미국을 찾았다. 그리고 경북 경주 아펙(APEC) 정상회의에서 열린 한미 정상화담의 극적 타결 소식이 전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6월 취임 이래 거의 반년 동안 한미 통상현안에 매달렸다. 이를테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끈질긴 버티기 협상 끝에 욕먹지 않을 만한 결과를 냈다.
대외 통상협상은 정부의 과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의 관계’라는 시선에서 살피면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공익을 추구하고 기업은 사익(오너 또는 주주의 이익)을 추구한다. 공익과 사익이 행복하게 만나면 좋겠지만 상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자칫 내가 낸 세금으로 재벌의 배를 불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 1970~90년대 고도성장기에 이런 일은 흔했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면서 특정 재벌과 유착했다. 정치인이 뒷돈을 받으면서 특정 재벌의 뒤를 봐줄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됐다. 산업 평화를 명분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장면에 이르면, 정부는 누구의 편인지 많은 의심을 샀다. ‘정경유착’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부패고리로 꼽혔다.
그런데 지금은 정경유착이라는 말조차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 기업의 성장이 큰 몫을 했다.
애초 정경유착의 주도권은 본래 정치권이 쥐고 있었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면서 재계 위에 군림했다. 정부가 인허가권을 휘둘렀고, 그 시절 높은 분의 뜻을 거스르면 기업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큰돈을 번다. 정치권과 재계의 권력 서열이 뒤바뀐 것 같은 분위기마저 엿보인다. 재벌 회장이 대통령을 만나 90도로 인사하는 풍경도 사라졌다.
여기에 대기업은 거의 모두 3세 경영 승계를 마무리하면서 큰 약점이 사라졌다. 어느 기업은 벌써 4세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도 이제 세금을 두들겨 맞거나 감옥 갈 일이 없어졌다.
정치권도 많이 투명해졌다. 재벌의 뒷돈을 받아 정치자금을 조성하던 관행은 몇 번의 큰 수사와 재판으로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재벌은 트럭에 현금을 싣고 가서 ‘차떼기’로 정치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는데, 노무현 정부의 대선자금 수사로 그 면모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재벌들이 줄줄히 끌러들어갔다. 이제 재벌이 돈을 주고 싶어도 뒷탈이 겁이 나서 멈칫하게 생겼다.
또 하나 따져볼 지점은 민주당의 변화다.
애초 민주당은 ‘서민의 정당’을 자처하면서 대기업과 거리를 뒀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재벌 회장들과 회동하는 게 중요한 뉴스가 됐다. 재벌 회장들과 밥을 먹으면 노동계가 즉각 반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젠가 해외 순방 이후 기자들을 만나 “외국에 나가니 우리 기업들이 대한민국의 큰 확약을 하고 있더라. 한국은 몰라도 삼성과 엘지는 알더라”라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 대통령의 기업 칭찬이 낯설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역대 민주당 소속 대통령과 많이 달랐다. 취임 이후 곧바로 대기업 회장들을 만났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차례 회동했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폭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들이 ‘원팀’이 됐다는 평가가 미국 워싱턴DC에서 나왔다.
이런 와중에 이 대통령은 산업재해 문제를 두고 연일 기업을 압박했다. 올해 7월25일 직접 SPC 삼립 시흥공장을 방문해 산업재해 사망사고 방지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은 얼마나 놀랐을까.
이 대통령의 기업관은 거칠게 보면 투트랙을 걷는 듯하다. 혁신을 통해 미래를 개척하는 기업은 공익과 사익을 한 덩어리로 본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에너지전환은 개별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보고 국가 예산(내가 낸 세금)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 안전대책에 쓸 돈을 아끼는 회사, 그렇게 연명하거나 아니면 오너가 부를 쌓는 기업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계속 노동자의 편을 들겠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은 친기업일까, 반기업일까.
기업인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될 무렵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유행했다. 그 무렵 민주당은 계속 반기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우리 정치도 경제도 많이 성장했다. 정당의 경제정책 가운데 산업정책은 여전히 중요할 부문이다. 이제는 친기업/반기업의 구분이 아니라, 어떠한 산업 질서를 구축할지 정당이 경쟁하는 시대가 된 듯하다. 안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