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건설기계업계 안팎에 따르면 정 회장은 외부의 시각과 비교해 건설기계 계열사가 처한 상황을 더 녹록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증권업계에서는 2023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의 영업이익이 내년부터는 세계적 금리 인하 기조에 따른 수요 회복과 함께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와 달리 정 회장은 현재 건설기계 업황을 넘어 미래에서 치열한 경쟁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낙관적 해석보다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 총수로서 진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정 회장은 이날 그룹 임직원을 향한 담화문에서 “건설기계 사업은 미국 관세와 초대형 경쟁업체의 시장 잠식으로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야심차게 개발한 소형 건설장비도 현재 원가 수준으로 판매가 어렵고 그룹 건설기계 회사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최근 중국 굴착기 1위 업체를 벤치마킹해본 결과는 충격적이다”며 “단순히 인건비만 저렴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스마트·자동화 공장을 구축해 우리와 격차를 더욱 벌려가고 있다”고 위기의식을 높였다.
정 회장은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의 합병법인 ‘HD건설기계’를 통해 커질 덩치와 최첨단 생산설비를 경쟁력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특히 경영역량을 쌓으면서 다져왔던 영업능력을 건설기계 부문에서도 발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HD건설기계는 합병 뒤 시너지를 확대하기 위해 공통지원 조직을 만들고 적치장, 서비스·부품 공급센터(PDC) 등의 통합작업을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건설기계 수주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정 회장은 “건설기계 사업은 합병을 계기로 최적의 글로벌 생산체계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을 뗐고 생산경쟁력을 높여줄 울산캠퍼스도 완공했다”며 “이제는 영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업 네트워크와 서비스 역량을 확실하게 구축하겠다”며 중장기 청사진 아래 사업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합병 뒤 HD건설기계는 2030년까지 매출목표로 15조 원을 잡았다. 합병 전 두 건설기계 계열사의 합산 매출을 약 2배가량 높이겠다는 것인데 이를 정 회장이 직접 이끌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정 회장이 HD현대그룹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가장 집중했던 분야는 단연 영업 부문이 꼽힌다.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에서 잠시 일한 정 회장은 보스턴컨설팅그룹을 거쳐 2013년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 선박영업부로 복귀한 뒤 오랫동안 조선 수주 확대에 힘써왔다.
정 회장은 2015년부터 2년 동안 현대중공업 조선해양영업총괄부문장을 지냈다. 이후 다른 계열사의 대표를 잠시 맡았다가 2018년에 말에 현대중공업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를 지내며 그룹의 영업전문가로 평가되는 가삼현 당시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과 함께 조선3사(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의 수주영업을 책임졌다.
정 회장이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 마지막 해였던 2021년 HD현대그룹은 조선사업에서 200억 달러(약 28조 원)가 넘는 일감을 도크에 채웠다. 코로나19 영향이 잦아들면서 연초 세웠던 목표(149억 달러)를 크게 초과한 성과다.
2019년과 2020년에는 각각 73%, 91%의 수주 목표 달성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후반 극심했던 조선업황 부진과 코로나19 첫 해 영향을 고려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국내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최연소 회장에 오른 정 회장은 승진할 때마다 건설기계 사업을 직접 챙기고 변화를 주도해왔다.
정 회장은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현 HD현대인프라코어) 인수작업을 주도해 건설기계 사업을 그룹 핵심사업으로 육성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이어 정 회장이 2021년 말 부사장에서 4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한 이듬해 초에 HD현대(옛 현대중공업지주)는 그룹명을 바꾸고 기존 조선·정유사업에 더해 건설기계를 3대 주력사업으로 키우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 정 회장이 부회장 시절인 2024년 1월 미국 라스케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HD현대 >
2023년 말 부회장으로 승진한 정 회장은 바로 다음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건설장비의 무인·자율화, 디지털 트윈, 친환경 및 전동화 등 미래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 건설현장을 구현하겠다는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 비전을 제시했다.
국내 기업 경영인 가운데 유일하게 CES 2024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HD현대그룹의 비전으로 건설기계를 통한 지속가능성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정 회장의 사업 강화 의지가 읽힌다는 평가가 나온다.
HD건설기계는 지난 7월1일 합병 발표 이후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함심사 통과, 주주총회 승인 등을 거쳐 최근 주식매수청구권 문턱도 넘으며 출범을 눈앞에 두게 됐다.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는 지난달 16일부터 이달 10일까지 주식매수청구권 신청을 받은 결과 1억7735만 원, 7억612만 원의 접수를 받았다. 당초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금액 한도는 각각 1500억 원, 2500억 원을 설정했는데 이에 크게 못 미치는 규모다.
HD건설기계가 내년 1월1일 출범을 앞둔 가운데 정 회장은 향후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HD현대사이트솔루션 대표이사에 정식 선임된다. 이번 인사에서 함께 내정된 송희준 HD현대사이트솔루션 영업전략 본부장 부사장과 공동대표 체제를 갖춘다.
정 회장은 이날 담화문에서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퓨처빌더’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장상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