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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고은 시인

독재에 저항한 시인, 노벨문학상 후보
이승용 기자 romancer@businesspost.co.kr 2017-01-02 0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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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고은 시인
▲ 고은 시인.


고은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이자 참여시인으로 한국 문학계의 원로다. 본명은 고은태이며 호는 파옹(波翁)이다.

1933년 8월 1일 지금은 군산시로 편입된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미술부에 들어가 화가로서 꿈을 품었으나 우연히 습득한 한하운 시인의 시집을 감명 깊게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군산중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고향을 떠났다. 고향인 군산에서 좌우익 간에 보복학살이 횡행해 이에 절망하고 방황했다.

술에 취해 살면서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으나 살아났다. 이후 본명 은태(銀泰)에서 끝자를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했다.

한국전쟁 도중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이듬해 조계종 초대종정 효봉스님의 제자가 됐다.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에서 수행생활을 했다. 효봉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됐다.

시인협회 조지훈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 ‘봄 밤의 말씀’, ‘눈길’등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김동리, 오상순, 김수영씨 등과 어울리며 살았다.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고 환속한 뒤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강한 시들을 발표하다가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현실참여시인으로 전향했다. 이후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투사의 길을 걸었다.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씨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간사를 맡았다. YH사태 개입혐의 등으로 투옥됐으며 김대중내란음모죄에 연루돼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들을 해금하자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북한의 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했다.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장에 피선됐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에 올랐으나 이것이 문제가 돼 다시 투옥됐다.

미 하버드대 연구교수를 지내는 등 활발한 해외활동으로 한국문학을 알리는데 나서고 있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명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시인이자 참여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재에 평생 투쟁해왔으며 대표적인 민족좌파 시인으로 분류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수행단으로서 참가했고 2000년 6월 14일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발표에 맞춰 남북만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당시 애도 성명을 내기도 했으며 2005년 이후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보수정권이 출범한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이사장 자리를 위협받기도 했으나 문단에서 차지한 그의 위상이 절대적이기에 보수정권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1950년대를 본인 문학의 정체성이자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전후문학’이 근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특히 다작을 하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늙은 청년’이라고 일컫는다. 시의 창작에 있어서 그만큼 열정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시들이 내 뒤통수에서 써달라고 잡아당긴다”며 “50여 년간 모국어의 은혜로 시를 운명으로 삼아 왔지만 시집을 낼 때마다 방금 시인이 된 것처럼 설렌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표작인 ‘만인보’는 그의 다산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기록이란 뜻으로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연작시다. 총 4001편에 걸쳐 우리민족의 다양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만인보는 고은이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착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묵었던 방에 수감됐던 고은은 단식투쟁을 걸쳐 국어사전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통해 만인보 작성을 위한 어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고은은 1986년 만인보를 3500편으로 완결하겠다는 공언과 함께 1-3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988년 4-6권, 1989년 7-9권, 1996년 10-12권을 출간했다. 1997년 13-15권, 2004년 16-20권, 2006년 21-23권, 2007년 24-26권을 내놓았고 2010년 27-30권을 출간하며 완간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한계가 존재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칭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던 중진시인 이시영씨는 고은의 대표작인 만인보에 대해 “그 다산성에 비해 그다지 특출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비슷비슷한 시들의 되풀이 내지 앞의 작품들의 모방이 결코 대작이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추켜세울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인이란 민족 또는 민중이라는 집합적 실재와의 일치를 통해 확대를 꿈꾸는 자아지만 ‘만인보’에 담긴 ‘만인’은 인간 중생에 대한 인정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수긍할 만한 민주주의 사회의 비전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교수신문이 2006년 신진문인 95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 결과 고은은 이문열과 함께 과대평가된 국내문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고은은 다작에 대해 “다작(多作) 개념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한계에 익숙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일천한 우리 근대문학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며 1년에 한 두 편의 시를 썼던 과거 전통을 미화하거나 맹신해서는 안된다”고 반론하기도 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10년 넘게 한국인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다.

고은의 시집은 스웨덴 등 세계 주요국에 번역되서 출간되고 있다. 스웨덴 최대 일간지인 다겐스 니헤테르은 “고은의 시는 간결함과는 정반대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넉넉함이 있다. 독자로서 인류의 거대한 품에 안기는 기분”이라고 평가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꼽히지만 수상에 매번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한국문학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은이 남북관계에 매몰되고 인간의 근본성과 철학문제에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고은 스스로도 “번역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은의 노벨상 수상실패를 작품성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실제로 노벨문학상은 작품성보다도 국가의 위상 변화나 유행기조에 따라 결정된다는 평가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고은의 시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지만 그의 삶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한국문학계의 원로이자 독재에 저항했던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평가된다.

김형수 시인은 “고은의 시는 표절할 수 있지만 고은의 생은 표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52년 출가해 일초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됐다.

1958년 불교신문을 창간해 주필이 됐으며 1960년 해인사주지대리를 맡기도 했다. 1962년 환속했다.

1958년 현대문학에 ‘폐결핵’ 발표하며 등단했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초대대표간사를 맡았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에 올랐다.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9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버클리대 초빙교수를 거쳐 2007년 서울대 초빙교수 2008년 단국대 석좌교수를 맡기도 했다.

201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친선대사에 선정됐으며 2015년부터 세계한인지식재산전문가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2005년부터 겨레말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 '만인보'를 비롯해 '조국의 별' '전원시편' '아침이슬' '해금강' '백두산' 등이 있다.

◆ 학력

1943년 미룡초등학교 입학해 1945년 월반했다.

1947년 군산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1950년 6.25전쟁 발발로 학교교육을 미처 마치지 못했다.

2010년 단국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2011년 전북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2015년 한신대학교 문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 고근식씨,어머니 최점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내는 이상화 중앙대 명예교수다. 이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고은에게 팬으로서 몇 차례 편지를 보내며 인연을 이어갔다.

이 교수가 1982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오자 1983년 5월 5일 서울 수유동 안병무 교수 집 뜰에서 함석헌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고은의 나이는 쉰, 이상화씨는 서른여섯이었다.

딸로 차령씨가 있다. 이름은 신접살림을 차렸던 안성 인근의 차령산맥 이름을 따서 지었고 겨울에는 추울까봐 나령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차령씨는 런던대에서 현대미술사를 공부했으며 고은은 딸을 위해 동시집을 내기도 했다.

◆ 상훈

1974년, 1986년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1988년과 1998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1994년 대산문학상, 2007년 영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유심문학상, 2014년 공초오상순문학상을 받았다.

2015년 제2회 심훈문학대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는 2005년 스웨덴 시카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에서 비외른손 훈장을 받았다.

2008년 캐나다그리핀문학상과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아메리카 어워드를 받았다.

2014년 마케도니아 스트루가 국제시축제 황금화관상을 받았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 상훈

1974년, 1986년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1988년과 1998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1994년 대산문학상, 2007년 영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유심문학상, 2014년 공초오상순문학상을 받았다.

2015년 제2회 심훈문학대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는 2005년 스웨덴 시카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에서 비외른손 훈장을 받았다.

2008년 캐나다그리핀문학상과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아메리카 어워드를 받았다.

2014년 마케도니아 스트루가 국제시축제 황금화관상을 받았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어록


“우리 정부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 정부인가 알 수 있다. 아주 천박한 야만이다” (2016/12/26, 자신이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든 데 대해)

“인문(人文)은 우리의 근원을 알아가고 어디로 가야할지 깨닫는 과정이다. 이 시대는 인문학이 필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이럴 때일수록 책을 통해 인문의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의 핵심은 시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다” (2014/04/02,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린 ‘책 읽는 국회의원 모임/저자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해)

“일본 오키나와의 현실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제주도가 입에 달고 다니는 평화라는 그 말은 의미가 없다. 강정에는 강정만 있어야 한다” (2012/05/02, 제주대 아라뮤즈홀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열린 문화광장 특강이 끝난 뒤 제주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우리는 미증유의 대통령을 경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언어는 일단 대통령의 언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언어에는 위선적 품위나 품격이 필요하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사람은 이승만,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명에 불과했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은 늘 문장화된 문자언어를 썼으며 비서가 써주는 문장이 아닌 자기만의 문체가 있었다.” (2007/06/13,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광화문문화포럼 주최로 열린 제73회 아침공론 마당에 강연자로 참석해)

“노무현 정부의 민주적 역량 부족은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민주주의 대의를 떠났다는 말은 찬성할 수 없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천하 명군도 정치적 명답을 내놓기 어렵다. 그렇게 우리 사회 각 영역의 유아독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투명해진 것은 놀랍다. 노무현의 매일매일은 우리 시대가 야생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는 당돌하고 거침없다. 그의 직설들은 누구의 충고도 받지 않는 오기로 보인다. 앞으로의 1년이 지나면 우리는 한동안 적막할 것이다. (2007/01/24, 한 매체와 서면인터뷰를 통해)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사양하겠다.”(2006/10/25, ‘문학의 집·서울’에서 열린 ‘수요문학광장’ 강연에서)

“오늘은 나의 날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인의 향연을 축하합니다. 지금 한반도는 이겨내야 할 시련을 맞고 있습니다. 내 문학의 정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2006/10/12,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자 경기 안성 자택 대문에 붙여놓은 글을 통해)

“통일을 독일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봐선 안된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긴 과정 그 자체이며 그렇다면 이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2000년 그 때부터 통일이 시작된 것이고 2100년, 2200년까지 갈지 몰라도 어쨋거나 하나하나 통일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한다. 북한의 연방제,남한의 연합제가 아니라 다연방제를 주장한다. 각 도를 나눠 수상이 있는 정부로 만들고 수상회의에서 최고 원수를 추대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2005/11/29, 국회 21세기 동북아평화포럼 제31차 조찬 토론회에 참석해)

“시가 죽었다는 위기담론은 거품이다. 본질적으로 시를 믿고 있으면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드는 현상적인 부분에 대해 민감할 필요가 없다. 시는 시집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서 매일같이 새로 만들어지는 ‘심장의 뉴스’다. 시는 살아있다. 시는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지만 인간이 시를 부르니 살아 있는 것이다. 시를 비롯한 순수문학이 외면 받고 있다는 위기론은 독선이다. 시는 지구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살아있는 것이다”(2005/11/25, ‘관악초청강좌/시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오늘 우리 남녘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은 부푼 기대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북녘 땅을 향해 떠나려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 마찬가지로 설레는 눈을 빛내며 우리를 맞이할 한 핏줄,한 민족의 형제 작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분단문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도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학의 힘이 현실세계의 질곡을 타개하는 기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것과 같은 큰 일이 우리의 이 만남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우리는 감히 해봅니다.” (2005/07/19,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남측 참가단장으로 참석하며)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었다.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백과 두보는 중국문학의 근본에 술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가를 자랑한다. 시와 술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 그들 고대 서정의 광활한세계였다.

술의 고전적 의미가 모독당하는 것과 함께 시적 절실성이 감소되어 간다. 머리로 시를 쓰는 시인이나 안테나로서의 시인에게는 삶과 역사에 대한 절실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디 시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말기 바란다.” (2002/09/01, 시인 고형렬씨가 발행인으로서 재창간한 계간지 ‘시평’에 실은 ‘시의 벗들에게’란 글에서)

◆ 평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시인이자 참여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재에 평생 투쟁해왔으며 대표적인 민족좌파 시인으로 분류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수행단으로서 참가했고 2000년 6월 14일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발표에 맞춰 남북만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당시 애도 성명을 내기도 했으며 2005년 이후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보수정권이 출범한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이사장 자리를 위협받기도 했으나 문단에서 차지한 그의 위상이 절대적이기에 보수정권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1950년대를 본인 문학의 정체성이자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전후문학’이 근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특히 다작을 하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늙은 청년’이라고 일컫는다. 시의 창작에 있어서 그만큼 열정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시들이 내 뒤통수에서 써달라고 잡아당긴다”며 “50여 년간 모국어의 은혜로 시를 운명으로 삼아 왔지만 시집을 낼 때마다 방금 시인이 된 것처럼 설렌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표작인 ‘만인보’는 그의 다산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기록이란 뜻으로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연작시다. 총 4001편에 걸쳐 우리민족의 다양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만인보는 고은이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착상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묵었던 방에 수감됐던 고은은 단식투쟁을 걸쳐 국어사전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통해 만인보 작성을 위한 어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고은은 1986년 만인보를 3500편으로 완결하겠다는 공언과 함께 1-3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988년 4-6권, 1989년 7-9권, 1996년 10-12권을 출간했다. 1997년 13-15권, 2004년 16-20권, 2006년 21-23권, 2007년 24-26권을 내놓았고 2010년 27-30권을 출간하며 완간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한계가 존재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칭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던 중진시인 이시영씨는 고은의 대표작인 만인보에 대해 “그 다산성에 비해 그다지 특출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비슷비슷한 시들의 되풀이 내지 앞의 작품들의 모방이 결코 대작이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추켜세울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인이란 민족 또는 민중이라는 집합적 실재와의 일치를 통해 확대를 꿈꾸는 자아지만 ‘만인보’에 담긴 ‘만인’은 인간 중생에 대한 인정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수긍할 만한 민주주의 사회의 비전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교수신문이 2006년 신진문인 95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 결과 고은은 이문열과 함께 과대평가된 국내문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고은은 다작에 대해 “다작(多作) 개념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한계에 익숙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일천한 우리 근대문학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며 1년에 한 두 편의 시를 썼던 과거 전통을 미화하거나 맹신해서는 안된다”고 반론하기도 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10년 넘게 한국인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다.

고은의 시집은 스웨덴 등 세계 주요국에 번역되서 출간되고 있다. 스웨덴 최대 일간지인 다겐스 니헤테르은 “고은의 시는 간결함과는 정반대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넉넉함이 있다. 독자로서 인류의 거대한 품에 안기는 기분”이라고 평가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꼽히지만 수상에 매번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한국문학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은이 남북관계에 매몰되고 인간의 근본성과 철학문제에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고은 스스로도 “번역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은의 노벨상 수상실패를 작품성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실제로 노벨문학상은 작품성보다도 국가의 위상 변화나 유행기조에 따라 결정된다는 평가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고은의 시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지만 그의 삶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한국문학계의 원로이자 독재에 저항했던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평가된다.

김형수 시인은 “고은의 시는 표절할 수 있지만 고은의 생은 표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기타

스스로를 풍경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버스나 지하철등 대중교통을 타면서 보는 창밖의 풍경에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어린시절 별명은 낯을 많이 붉히고 숫기가 없다는 뜻에서 ‘암사내’였다.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 등 한문을 배웠고 마을 머슴에게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일제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다. 초등학교 때 월반을 했으며 이후 군산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사 수행생활 시절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과 같이 지내기도 했다.

본명인 고은태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1969년 통행금지에 걸려 신분증을 보여줘야 했을 때 곁에 있던 최인훈 작가가 고은의 본명이 고은태인 것을 알게 됐다. 최인훈이 이후 “은태씨”라고 부를 때마다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양쪽 고막이 손상돼 인공고막을 통해 청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상대방이 말하면 귀를 귀울이는 자세로 듣는다. 세상을 등지려고 했던 젊은 시절에 세상의 소리가 싫다고 청산가리를 양 귀에 넣었는데 한쪽 고막이 그 때 녹아내렸고 나머지 한쪽 고막은 1979년 미국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반대데모를 하다 잡혀가 구타당해 파열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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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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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송
고은 시인께서 받으신 학위의 공식명칭은
문학 명예박사가 아니라
명예 문학박사 입니다.
   (2017-05-03 01: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