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일 서울 중구 SK T타워 슈펙스홀에서 열린 ‘사이버 침해 관련 일일 브리핑’에 참석해 대국민 사과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설명 |
[비즈니스포스트] "아빠 SK텔레콤 이동통신 쓰죠? 유심 교체하셨어요?"
"글쎄, SK텔레콤이 해킹인가 뭔가 하는 걸 당해 정보가 많이 빠져나갔다고 난리던데, 난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통화도 잘 되고. 2차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뭔 서비스에 가입하고, 뭘 교체하라고 하던데, 뭘 하라는 건지도 잘 못 알아듣겠고."
"집 근처 SK텔레콤 대리점에 가서 해달라고 하지. 가 봤어요?"
"당연히 가 봤지. 그런데 지금은 다 정신없이 바쁘다며, 집에 가서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문자메시지로 부르면 그 때 오래. 뭘 어쩌라는 건지 몰라서 테레비 보면서 속만 끓이고 있어. 온 김에 너가 좀 해주고 가."
"하여간 SK텔레콤 이놈들! 아빠는 옛날 한국이동통신 시절부터 SK텔레콤 써왔잖아. 한 30년 넘었지?"
"내 친구들 중에도 30년 가량 써온 사람들 많은데, 이번 사태 이후 카톡에서 알뜰폰으로 옮겼다며 갈아타라고 권하는 얘기 많이 해. 월 요금이 커피 한잔 값 수준으로 팍 줄었대. 1등 이동통신사라고 해서 비싼 요금에도 믿고 계속 썼는데, 이번 사태 때 보니까 알뜰폰이랑 다를 게 없다는 거야. 알뜰폰으로 갈아타서, 빨리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요금도 아끼자는 얘기 많이 해."
"맞는 얘기네. 그나저나 SK텔레콤 큰 일 났네. 꼴통 충성 가입자 우리 아빠까지 SK텔레콤도 못믿겠다며 알뜰폰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ㅎㅎ"
어버이날(5월8일)을 앞두고 긴 연휴를 맞아 충북 충주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뵙고 함께 밖에 나가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들렀는데, 옆 자리에서 이런 대화 내용이 들렸다. 잠시 뒤 뒷자리에 새로 자리를 잡은 가족들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들려왔다. 직업상 귀가 쫑긋해졌다.
보통 이 즈음에는 대통령 선거 얘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고, 후보 중 누구 누구는 어쩌구 저쩌구 등등. 그런데 이번 연휴 때는 특이하게도 SK텔레콤 `유심 해킹' 사태 얘기부터 하는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런 얘기는 식사 뒤 차를 마시러 들린 카페에서도 들렸다.
부모님이 어느 사업자 이동통신을 쓰고 휴대전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묻고 답하다가 SK텔레콤의 행태를 성토하며 `이 참에 SK텔레콤 호구 노릇 그만 하고 알뜰폰으로 옮겨 요금이나 아끼자'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는 흐름이 뚜렷했다.
이전에 통신사가 해킹으로 가입자 개인정보를 탈취당했거나 통신구 화재 등으로 시민들의 통신 이용이나 일상 생활에 불편이 생겼을 때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가 1차 조사 결과를 내놓고, 해당 통신사 최고경영자가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청문회에 불려가 호된 `다구리를 당하는'(몰매를 맞는) 것으로 한고비가 넘어가곤 했다.
이후 정부와 정치권의 `철저한 피해 보상' 주문을 바탕으로 사업자가 `적절한 수준'의 피해보상 방안을 내놓고 언론을 `맛사지'하는 것으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식으로 지나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엔 `뒤끝'이 길어지는 모습이다. 과기정통부 민관합동조사단이 지난 4월29일 1차 조사 결과를 내놨고, 국회 과방위가 30일 SK텔레콤 대표를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시켜 한 목소리로 책임을 추궁하고 사후 대책을 주문하는 등 몰매를 가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황이 잠잠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SK텔레콤이 코너로 몰리는 모습이다.
▲ 유영상 SK텔레콤 대표이사가 4월3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에서 열린 방송통신 분야 청문회에서 유심 해킹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
우선 정치권은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를 압박하고 있다. SK텔레콤 쪽에서 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꺼내고 싶지 않은 카드를 지목당한 것이다.
지난 4월30일 국회 과방위가 유영상 대표를 증인으로 불러 이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으나, 유 대표는 끝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다. 과방위 위원들이
최태원 SK 회장을 8일 열리는 청문회 증인 명단에 올리는 강수까지 두며 을렀으나 유 대표는 끝내 확답을 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8일 예정된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국회 과방위 쪽에 통보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란 이유를 댔다.
대신 SK텔레콤이 과기정통부 요청을 받아 매일 오전 언론에 상황을 설명하는 일일브리핑 자리에 7일 갑자기 참석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한다는 말만 반복했을 뿐, 주요 관심사였던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에 8일 청문회에서 과방위 위원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유심 해킹에 불안감을 느껴 번호이동을 통해 이탈하는 SK텔레콤 가입자들의 위약금 면제 여부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진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이라, 과방위 위원들도 물러설 여지가 별로 없다. 대선 후보를 둔 각 당 모두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성과를 내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에는 `통신품질 불량'을 이유로 중도 해지하는 경우에는 위약금을 면제하도록 돼 있고, SK텔레콤 이용약관에도 `사업자 귀책 사유' 시에는 위약금을 면제하도록 돼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과방위 최민희 위원장의 요청으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SK텔레콤의 유심 해킹 사태와 사후 대처 행태에 불안감을 느껴 번호이동을 하는 가입자의 중도 해지 위약금을 면제하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경영상 배임 행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가입자들의 이탈 행렬도 SK텔레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SK텔레콤의 위기 대처 능력과 위기 상황 발생 시 가입자를 대하는 행태 등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껴 떠나는 모습이 역력하다. `1등 이동통신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겠거니' 하며 무작정 믿고 써온 `충성 가입자'들이 `이번에 당해 보니 그 놈이 그 놈일세'라는 실망감을 느껴 이탈하는 사례가 많다.
이미 유심 해킹 사태가 공표된 4월18일 이후 5월6일까지 번호이동을 통해 KT와 LG유플러스로 이탈한 가입자만 25만명에 육박한다. 이 기간 SK텔레콤의 번호이동 순감 수치는 21만여명에 달했다.
4월 말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3만6천여명까지 치솟았던 SK텔레콤 가입자 이탈 수치가 연휴 기간 들어서며 1만3천명대까지 떨어지는 등 안정화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긴 하다. 하지만 하루 100명 안팎이던 평소와 비교하면 아직도 100배 이상 많은 수치다.
게다가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카드가 현실화하면 이 수치는 언제든지 다시 늘어날 수 있다.
참고로, 이는 알뜰폰으로 옮겨간 가입자는 빠진 수치다. 이동통신 3사 간 번호이동 수치는 일별로 집계돼 공개되지만, 알뜰폰으로 이탈한 수치는 월별로 집계돼서다.
20~30년 전부터 SK텔레콤 이동통신 사용해왔고, 지금은 `어르신' 소리를 듣는 충성 가입자들의 알뜰폰 전환은 새로운 흐름이다. 그동안 알뜰폰으로의 번호이동은 디지털 이용에 밝은 젊은 알뜰 소비자족 쪽에서 주로 이뤄졌다.
SK텔레콤의 위기대처 능력이 바닥 수준을 보이면서다. 유영상 대표도 동의한 대로 `사상 최악의 해킹'을 당하고도, 미적거리다 관계 기관 신고를 제 때 하지 않았고, 가입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고지하는 조처도 제 때 하지 않았다. 모두 법 위반 소지가 있다.
이른바 사후 대책도 이기적이고 부실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유심보호서비스 가입을 권해 가입자들을 컴퓨터 앞에 줄세웠고, 유심 무상 교체 역시 재고 준비도 제대로 안해놓고 발표해 가입자들을 대리점 앞에 줄세웠다. 이 과정에서 가입자들은 유심 교체를 위해 오픈런을 하고, 대리점 앞에 긴 줄을 서다 시간만 낭비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서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나마도 과기정통부의 요청에 떠밀려 나선 경우가 많았다.
SK텔레콤이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해 이심(eSIM) 도입에 적극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한 질타도 쏟아진다. 가입자들을 줄 세우고, 유심 칩 교체와 앱 추가 설치 등을 통한 추가 이익 기회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유심은 손톱 크기 만한 하드웨어 모양이고, 이심은 휴대전화 칩 속 소프트웨어를 통해 원격으로 본인 인증 정보를 저장하거나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심 방식이 도입돼 있었다면, 유심 교체 대신 사업자가 원격으로 본인 확인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게 가능하다. 가입자들이 대리점을 향해 오픈런을 하거나 줄 설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동통신 3사의 네트워크(통신) 품질은 별반 차이가 없다. 과기정통부가 해마다 3사의 통신 품질을 측정해 공개하고 있는데, 특정 사각지대 일부를 제외하면 이용자들이 체감할 정도의 품질 차이는 없다. 알뜰폰 역시 3사의 통신망을 그대로 빌려 재판매하는 방식이라 통신품질에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3사, 그 중에서도 SK텔레콤과 알뜰폰 사이의 요금 격차는 크다. 특히 어르신 등 소량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삼는 요금제의 요금 격차가 크다. 휴대전화를 음성 통화, 문자메시지 송수신, 카톡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한두개 이용 정도로 활용하는 어르신들의 경우, 알뜰폰으로 번호이동을 하면 월 요금이 커피 한잔 값 정도로 내려간다.
SK텔레콤 가입자 가운데 20~30년 가까이 써온 `충성 가입자'들은 `1등이니까 뭔가 다르겠거니' 하는 신뢰와 `대리점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편안함에 젖어, 알뜰폰 요금이 이 훨씬 싸다는 걸 알면서도 가입을 유지해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유심 해킹 사태로 `1등 이동통신 사업자 SK텔레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30년 가량 써와 이제 60~70대가 된 어르신 쪽에서는 `이제 늙었다고 괄시하나' 하는 배신감이 들 수도 있다. `스피드 011',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믿고 쓰는 011' 같은 광고로 쌓아온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동안 아빠는 SK텔레콤의 호구였던 거야 ㅎㅎㅎㅎ". 충주 식당에서 식사 중 옆자리에서 들려온 말이다. 큰 깨달음을 준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