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 뒤 헌정 질서가 흔들리며 온 나라에 휘몰아쳤던 어둠과 불안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곧장 대한민국이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나라로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사실상 힘들다.
돌이켜보면 무도했고, 무능했으며, 무책임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기나긴 재임 기간 천일(정확히 1060일)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나라 공동체가 받았던 상처는 너무나 컸다. 대한민국의 잠재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동안 받았던 상처는 곧바로 털고 일어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생때같은 수많은 목숨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서울 한 복판 이태원에서 수백 명이 깔려서 죽고 다쳤다. 충북 오송 지하차도에선 폭우에 14명이 숨진 참사도 벌어졌다.
이에 정부를 향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불신으로 곪은 사회적 상처는 쉬이 낫기 힘들다.
윤석열 정부가 앞뒤 안 가리고 무식하게 밀어붙였던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료 공백으로 '응급실 뺑뺑이'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을 고비까지 갔다 와야 했다.
그 가운데 여럿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계에 자랑할 만 했던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쑥대밭이 되었고 언제 회복될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실정 속에서도 윤 전 대통령은 이렇다할 사과가 없었고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와 부산 엑스포 유치의 실패로 국격을 잃어버린 일은 별 큰 사건도 아니었던 셈이다.
부인 김건희씨의 여러 비리 의혹 이상으로 무엇보다 진짜 심각한 윤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벌어진 폐해는 산 자들의 밥줄을 조여버렸다는 점이다.
물가는 치솟았고 경제성장률은 지난해부터는 급기야 0%대에 머무르며 겨우 역성장을 모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눈에 띄게 처참한 경제 성적표인데 회복될 전망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는 부자 감세 속에서 수십조 원의 세수 결손을 냈다. 정부에 돈이 없으니 힘든 민생을 그저 두고 봐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운 좋게 손에 쥔 권력이어서 그랬던 걸까. 윤석열은 태산 같은 권력의 무게에 둔감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 아래서 대한민국의 지난 천일은 참담했다.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을 내걸어 보수적 유권자의 마음을 얻으며 단 0.73%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집권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윤석열이 내세운 그런 가치보다는 전임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대선 승리의 더 큰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많다.
자신이 뭘 하겠다는 비전을 내세워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기보다는 전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 덕분에 집권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까지도 직선제 뒤 당선된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다.
코로나19에 성실히 대응해 국민 생명을 보호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에 국격을 높인 점을 인정받았다. 진중하고, 성실하며, 겸손한 태도도 여러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결국 정권을 당시 야당에게 내준 것은 부동산 정책 실패에 따른 집값 급등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자가 소유율은 60%가량이다. 다주택자를 고려하면 절반 가까운 사람들은 아직 자기 집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니 그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가구 재산의 대부분이 부동산으로 구성되는 우리나라 가구의 특성상 집값 급등은 희망이 사라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임기 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까지 드러나며 정권교체에 결정타가 됐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시장을 놓고 '조세 정의'에 입각한 정책을 폈다. 집 부자, 땅 부자에게 세금을 더 매기는 데 골몰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싼 값에 집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공급 정책에는 무관심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권 말기에야 부동산 공급 정책에 신경 쓰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다. 때늦은 후회였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뒤 높은 도덕성을 기반으로 출범한 정부였다. 그 도덕성의 우월함에 메몰돼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기본 원리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경제 정의는 중요한 가치이나 그것만으로는 세상이 다 돌아가지 않는데도 말이다. 문재인 정부에 서생의 문제 의식은 있었으나 상인의 현실 감각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는 그 반대였다. 자유와 시장을 내걸며 정책에 상인의 생각만 있었다. 보유세 및 종합부동산세를 낮췄고 이에 따라 사실상 부동산 투기를 방치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금리 인상으로 잠시 하락하던 집값은 이내 반등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주택공급에는 속도가 나지 않았고 결국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이 크게 올랐다. 이에 따라 많은 청년들이 고금리에도 빚을 얻어 집을 사면서 가계부채 문제는 더 불안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구나 탄핵 정국 와중에 국민의힘 주요 대선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금리를 포함한 종합적 고려 없이 강남, 서초, 송파 등 강남 3구 주요 지역의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난 2월 해제했다. 주택시장은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소신을 내세웠다.
그러나 서울 집값이 단기간에 급등하자 국토교통부까지 나섰고 오 시장은 단 한 달 만에 기존 정책을 번복하고 용산구까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확대해야 했다.
'정의의 신'을 모시던 문재인 정부나 '시장의 신'을 모시던 윤석열 정부 모두 가장 중요한 민생 문제인 부동산 정책에서는 선무당이었던 셈이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서울 영등포구 소상공인연합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소상공인연합회 민생경제 현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탄핵으로 이르면 5월 말 혹은 6월 초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현재까지 각종 차기 대선 지지율 관련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압도적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 대표는 현재 정국에서 차기 대통령에 가장 근접해 있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역동적인 대한민국에서 선거는 끝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대표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앞서 문재인·윤석열 전직 대통령이 했던 실수를 결코 반복해선 안 된다.
서생의 문제 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모두 고려해 부동산 정책 공약을 정밀하게 다듬어 국민에게 제시해야 당선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당선된다면 그 공약을 세밀하게 실행해야 성공한 대통령도 될 수 있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자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실패에서 배워 국민들이 공감할 부동산을 비롯한 경제 정책을 제시해야 재집권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
새로 뽑힐 대통령이 내란 잔당을 찾아 처벌하고, 사회정의와 관련해 검찰을 개혁하고, 권력구조의 혼란을 개선하기 위해 개헌하는 일은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대응해 새 대통령이 챙겨야 하는 안보나 외교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건 경제이고 특히 민생이다. 특히 살 집과 벌어먹고 살 가게와 밀접한 부동산 정책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집값 안정을 비롯한 민생 회복이 이번 조기 대선에서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화두가 되길 바란다.
대통령 탄핵이 두 번이나 이뤄진 뒤 들어설 새 정부가 펼칠 부동산 정책은 이전 정부와는 좀 달라지면 좋겠다. 신중하면서도 재빨라야 하고 정교하면서도 폭 넓어야 한다.
정부가 더 이상 선무당이어선 안 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이 시대에는 더 그렇다. 박창욱 건설&에너지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