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항공 엔진 제조사 롤스로이스 plc를 이끌고 있는 투판 에르긴빌직(Tufan Erginbilgic) CEO. 2023년 초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이후 회사의 실적이 반전되면서 주가가 역대 최고치로 급등했다. <롤스로이스 plc> |
[비즈니스포스트] 1988년 7월6일 밤,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120마일 떨어진 북해의 석유시추선 파이퍼 알파(Piper Alpha). 굴착기 감독관 앤디 모칸(Andy Mochan)은 거대한 폭발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숙소에서 뛰쳐나왔을 땐 기름을 잔뜩 먹은 갑판은 이미 불길에 휩싸였고, 그는 연기와 열기를 피해 간신히 갑판 가장자리까지 떠밀려왔다. 15층 높이의 갑판 위에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구명조끼조차 없이 북해 바닷속으로 몸을 날릴 것인가? 아니면 갑판 위에서 1%의 생존 희망을 가져볼 것인가? 불타는 갑판에 머물렀다간 불길이 삼켜버릴 것이라 생각한 그는 마침내 기름 덩어리로 불이 붙은 차디찬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는 어떻게 됐을까? 앤디 모칸은 끔찍한 부상은 입었지만 구조돼 생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북해 탐사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그날, 160명이 넘는 작업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자들이 앤디 모칸에게 왜 뛰어내렸느냐고 물었다.
“불길에 화를 당하느냐, 뛰어내리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뛰어내렸습니다.”(It was fry or jump, so I jumped)
때마침 변화 관리 분야의 컨설턴트 데릴 코너(Daryl Conner)가 앤디 모칸의 뉴스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그는 모칸의 선택에서 영감을 얻어 ‘불타는 갑판(burning platform)’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그의 책(‘Managing at the Speed of Change’)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명예교수이자 변화 관리 분야의 석학인 존 코터(John Kotter)가 ‘불타는 갑판’ 개념을 대중화하면서 경영 용어로 자리 잡았다. 조직 변화의 동기, 위기의식을 표현하는 메타포(metaphor)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발언을 보면서 ‘불타는 갑판’을 떠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 회장의 심정 또한 ‘불타는 갑판’과 다르지 않을 듯싶다.
그는 임원 세미나를 통해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며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이 이처럼 강한 메시지를 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삼성의 위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 강하고 엣지있던 예전 삼성으로의 전환이 가능할까? 쉽지 않은 일이다.
이 회장이 임원들에게 ‘독한 삼성인’이 되어 달라고 주문한 것도 삼성이 과거의 근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롤스로이스plc는 BMW 산하의 롤스로이스 자동차와 뿌리는 같지만 다른 회사다. BMW 그룹은 2020년 “롤스로스 자동차와 롤스로이스plc는 전혀 별개의 회사”(Rolls-Royce Motor Cars is a completely separate company from Rolls-Royce plc)라며 “롤스로이스 자동차는 BMW 그룹의 완전 자회사”(Rolls-Royce Motor Cars is a wholly-owned subsidiary of the BMW Group)라는 언론 자료를 내고 혼동하지 말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롤스로이스plc> |
기업 리더들은 종종 변화가 필요할 때 조직원들에게 두려움과 위기감을 심어주면서 ‘불타는 갑판’을 조직 활성화의 카드로 사용해 왔다. 그 한 예가 2010년대 노키아의 CEO 스티븐 엘롭이었다.
그는 노키아 최초의 비핀란드인 CEO였다. 엘롭은 취임 후 스마트폰 경쟁 시장에서 밀려난 상황을 언급하면서 직원들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경쟁자들이 우리의 시장점유율에 불을 지르는 동안, 노키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는 뒤처졌고, 큰 트렌드를 놓쳤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불타는 갑판에 스스로 기름을 부었습니다.”(영국 가디언 인용)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듯, ‘휴대폰 절대강자’ 노키아의 명성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엘롭은 급기야 2013년 휴대폰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하고 말았다.
여기 몇 해 전부터 ‘불타는 갑판’의 효험을 톡톡히 보고 있는 CEO가 있다. 롤스로이스plc를 이끌고 있는 낯선 이름의 투판 에르긴빌직(Tufan Erginbilgic·65)이다. 여기서 롤스로이스는 우리가 아는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항공 엔진 제조사 롤스로이스plc를 말한다.
두 회사는 뿌리는 같지만 별개 회사다. 롤스로이스 자동차(Rolls-Royce Motor Cars)는 독일 BMW 그룹의 완전 자회사다. 롤스로이스 plc는 항공기 엔진(보잉과 에어버스가 고객)을 비롯하여 선박 엔진, 발전 설비를 제작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투판 에르긴빌직 CEO는 지금은 튀르키예라고 부르는 터키 출신으로, 석유 대기업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에서 20년 근무했던 전직 임원이었다. 그가 117년 역사를 자랑하는, 하지만 체질이 허약해진 롤스로이스plc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건 2023년 1월이다.
투판은 4만2천 명의 직원들을 향해 ‘엄청나게 관리가 안 된’(grossly mismanaged) 회사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롤스로이스는 불타는 갑판(Rolls-Royce is a burning platform)”이라고 폭탄을 던졌다.
석유 대기업의 전직 임원이었기에 ‘불타는 갑판’ 선언은 아주 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비유였다. 신기하게도 그게 먹혀들었다. 마치 요술방망이를 보는 듯했다.
미국 경제지 포춘은 2023년 12월 “롤스로이스의 신임 CEO가 불과 12개월 사이에 ‘불타는 갑판’ 같은 회사를 30년 만의 최고 주가 수익률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호평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롤스로이스 최고경영자가 ‘불타는 갑판’을 엔비디아처럼 큰 이익을 내는 기업으로 바꿔놓았다.”(Rolls-Royce CEO Takes 'Burning Platform' to Nvidia-Like Gain.)
블룸버그통신의 올해 2월27일 기사 제목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투판 CEO가 경영을 맡은 지 2년 만에 빈사 상태의 회사를 되살리면서 사례 연구(case study)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비즈니스 교과서에 나와도 될 만큼 훌륭한 기업 사례라는 평가다.
투판 에르긴빌직이란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이스탄불 공대(Istanbul Technical University)에서 공학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모빌오일(Mobil Oil)에서 7년을 근무한 후 1997년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에 입사했다.
그는 BP의 산하 조직 CEO를 맡으면서 수익을 3배로 늘리는 기록적인 성과를 내는가 하면, 동시에 정유 및 마케팅 부문을 크게 혁신했다는 공을 인정받았다.
▲ 롤스로이스 plc는 보잉, 에어버스 등 35종 이상의 상업용 항공기에 엔진을 공급하고 전 세계적으로 1만 3000개 이상의 엔진을 서비스하고 있다. <롤스로이스 plc> |
2023년 롤스로이스 plc 사령탑에 오른 그는 사업부를 재편하고, 계약을 재협상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등 회사 구조를 단순화시키고 최첨단 기술 투자에 집중했다. 그런 추진력 덕에 ‘터보 투판(Turbo Tufan)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이런 외형적 변화는 외부에서 수혈된 경영자라면 대부분 시도하는 노력이다. 투판은 오히려 내부 변화에 주력했다. 그는 롤스로이스 plc의 운명을 역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문화를 대대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라 여겼다. 글로벌컨설팅 기업 맥킨지와의 인터뷰(2024년 10월 25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mindset)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전략보다 더 중요하죠.”
투판에게 ‘불타는 갑판’ 선언은 중대한 변곡점에 놓인 조직을 결집시키는 진정한 ‘내부 혁신의 외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대개 조직원들은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혁신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조직은 어떻게 변모시켜야 할까?
‘불타는 갑판’ 개념을 대중화시킨 존 코터 교수의 주장을 빌려보자. 그는 ‘코터의 변화 모델 8단계(Kotter’s 8 step change model)’로 유명한데, 그 8단계의 첫 번째가 조직에 위기감 조성하기(Creat a sense of urgency)이다.
리더는 먼저 조직원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조직원들이 변화하도록 동기 부여와 영감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변화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혁신적 선언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이야기로 돌아가면, 과거 이병철의 ‘도쿄 선언(1983년 삼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반도체 진출 선언)’,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도 그런 위기감, 절박감에서 나왔다. 이재용 회장은 단순한 ‘사즉생’의 메시지가 아닌 그걸 뛰어넘는 ‘그 어떤 선언’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다.
삼성뿐 아니라 리딩기업들은 저명한 행동과학자 모건 맥콜(Morgan McCall Jr.)의 ‘트로피 케이스(TROPHY CASE)’라는 개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거의 성공을 의미하는 트로프 케이스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걸 말하는데, 그런 함정에 빠지면 트로피가 크고 반짝일수록 그 눈부심에 눈이 멀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른바 ‘현타(현실 자각 시간)’가 오는 시점이다.
불타는 갑판(burning platform). 이 위기감은 그 어느 조직이든 찾아갈 수 있다. 눈부심에 눈이 먼 조직이라면 더 빨리 말이다.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