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사진)이 반도체 사업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 |
[비즈니스포스트] 나라 안, 나라 밖 모두 우리 기업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위기’ 한 복판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 안은 깊은 내수 침체 수렁에 정치적 대혼란으로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있다. 나라 밖은 트럼프발 관세 폭탄에 경기침체 우려가 깊어지며 수출로 먹고 사는 기업들의 한 숨이 늘고 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내세운 미국 트럼프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에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동맹국이고 적국이고 가리지 않고 던지는 관세 폭탄에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자국주의를 앞세워 세계 제조업을 자국으로 불러들여 세계 경제패권을 더 강하게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중국은 빠른 첨단기술 육성으로 인공지능(AI), 전기차, 로봇, 가전, 반도체, 조선, 석유화학, 철강 등 주요 제조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세계 경제가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가 주도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궁핍해지는 양극화가 뚜렷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경제와 산업은 미국의 앞뒤 가리지 않는 거센 압박과 중국의 급성장으로 미래 지속 성장 가능성을 잃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같은 저성장 위기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우리 경제의 대표 산업인 반도체, 반도체 기업 중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처한 상황을 보면 지금 우리 현실이 어떤지 여실히 드러난다.
삼성전자는 지난 30년 이상 D램 등 메모리반도체에서 압도적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해왔다. 하지만 최근 근원적인 메모리반도체 기술력에서 경쟁사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각) 미국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은 6세대 10나노급 ‘1c D램’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아직 10나노급 ‘1b D램’ 기술에 머물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삼성전자는 올해 6월이나 돼야 1c D램 기술 개발을 마친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10나노급 ‘1c D램’ 기술 개발을 끝냈다. D램 기술 공정 난이도는 1x(1세대), 1y(2세대), 1z(3세대), 1a(4세대), 1b(5세대), 1c(6세대) 순으로 높아진다.
‘세계 최초’ D램 기술 개발사를 써온 삼성전자가 D램 기술력에서 미국 기업, 그것도 메모리반도체 3위 사업자에 밀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반도체 기술은 한 번 기술 격차가 벌어지면 좀처럼 따라잡기 힘들다.
삼성전자는 세계적 AI 반도체 급성장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도 지난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밀렸다. 차세대 메모리 시장에서 3위 사업자가 된 것이다. 근원적 D램 기술력에서 밀린 삼성전자는 HBM4 등 차세대 메모리 시장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가장 많이 판매하는 DDR4와 DDR5 D램에선 중국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의 급성장으로 위협받고 있다. 중국 CXMT는 DDR4 D램을 대량 양산해 싼 가격에 내다팔며 삼성전자 D램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중국 CXMT는 지난해 세계 D램에서 5%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가져갔고, 앞으로 10년 후엔 30% 이상을 차지하는 지배적 사업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기업에 치여 삼성전자는 더 이상 메모리반도체 선도기업이 아닌 상황이 됐다. 메모리반도체 외에 공을 들이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은 지난해에만 5조 원이 넘는 적자를 봤고, 올해는 이보다 더 많은 적자를 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웨이저자 TSMC 회장이 지난 3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TSMC 미국 투자 발표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한 때 1위인 대만 TSMC를 바짝 추격했던 삼성전자는 이제 언감생심 TSMC의 경쟁 상대가 아닌 처지다. 파운드리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TSMC는 63%, 삼성전자는 9%다. 앞으로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트럼프의 반도체 관세 폭탄에 삼성전자는 미국에 서둘러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기술력에서 뒤지고 있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한다고 해도 고객사 수주가 힘든 처지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삼성전자 미국 공장 설비투자에 주기로 했던 보조금마저 거둬들이겠다고 하고 있다.
이에 비해 TSMC는 앞으로 4년간 미국에 1000억 달러(약 146조 원)를 투자해 추가로 파운드리 공장 3개와 패키징 공장 등을 건설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파운드리 첨단 3나노와 2나노 공정 기술력에 앞선 TSMC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반도체 수주를 독차지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 실패로 2나노 공정 기술 개발에 매달리고 있지만, 좀처럼 기술 안정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는 지금 위기가 아니라, 붕괴 직전에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엔 한국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중국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할 것이란 얘기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메모리반도체 산업에 안주해왔다. 메모리반도체 외에 시스템반도체 산업 역량은 키우지 못했다. 메모리가 무너지면 한국 반도체도 사라지는 것이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지금 사법 리스크 운운하며 등기이사에도 오르지 않고, 주요 사업 결정을 대부분 전문 경영인들에 맡기고 있다. 이 회장이 지금 위기 상황을 모를리 없다. 이 회장은 지금 선대 회장들처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삼성전자 반도체가 무너지면 삼성전자도 무너진다. 삼성전자가 무너지면 삼성그룹 자체도 무너진다.
전문 경영인들이 수십 조, 수백 조 원의 투자 결정을 내리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은 기업 오너가 결정해야 한다. 이 회장은 바닥으로 추락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위상을 되살리고, 나아가 한국 반도체 산업 성장의 역사를 이어갈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마치 선대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처럼. 김승용 산업&IT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