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SMC의 미국 내 대규모 반도체 공장 증설 발표가 대만의 국가 안보에 불안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에 최신 미세공정 기술 도입 여부를 두고 압박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비즈니스포스트] 대만 TSMC가 미국 트럼프 정부의 반도체 관세 압박을 피하려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 협상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첨단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넘어 자체 기술 확보를 궁극적 목표로 추진하는 만큼 대만에 이와 관련한 압박을 더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5일 파이낸셜타임스와 타이페이타임스 등 외신을 종합하면 TSMC의 반도체 설비 투자 발표를 두고 대만과 미국 정부의 입장에 다소 온도차가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TSMC의 투자가 “가장 앞선 기술의 반도체를 미국 땅에서 생산한다는 의미”라며 이를 통해 반도체에 부과되는 관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해당 발표가 나온 직후 TSMC가 최신 반도체 미세공정 기술을 모두 대만 내 공장에 유지할 것이라며 이와 상반된 입장을 전했다.
TSMC가 내년부터 2나노와 1.6나노 등 차세대 파운드리 신기술을 미국 공장에 도입할 수 있다는 예측을 확실하게 부인하며 선을 그은 셈이다.
미국과 대만이 이처럼 TSMC의 최신 미세공정 기술을 두고 사실상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는 향후 국가 간 무역 및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카드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TSMC의 최신 반도체 제조 기술은 인공지능 반도체와 첨단 군사무기, 고사양 프로세서 등 분야에 필수로 쓰이고 다른 기업을 통해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사실상 없다.
삼성전자와 인텔도 이와 유사한 파운드리 공정 상용화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 다수의 고객사에 충분히 기술을 검증받지 못했고 생산 능력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만약 미국이 최신 미세공정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게 된다면 중국의 침공을 비롯한 위협에서 대만을 지키기 위해 군사 지원을 강화할 이유도 줄어든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력이 국방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만큼 이런 시나리오를 피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 중단을 검토하는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대만 정부와 국민들의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대만에 TSMC의 최신 반도체 기술을 유지하는 일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이미 미국이 대만에 군사 지원을 지속할 필요성이 낮다고 언급했고 반도체 기술도 과거 대만이 미국에서 빼앗아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TSMC가 미국에 1천억 달러(약 145조 원) 규모 투자를 발표하자 최신 미세공정 기술 도입을 기정사실화한 것도 대만을 더욱 압박하는 수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정부가 TSMC에 미국 반도체 기업인 인텔을 지원하거나 기술을 공유하라는 요구도 꾸준히 내놓았다고 전했다.
TSMC가 미국에 반도체 연구개발 센터를 신설하겠다는 내용도 새로 발표한 만큼 대만의 기술이 미국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전망도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 TSMC 미국 애리조나 반도체 파운드리 1공장. |
결국 TSMC의 대규모 시설 투자 발표는 트럼프 정부와 대만 사이 반도체 및 무역, 외교 및 군사 협상이 본격화되는 시작점에 불과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TSMC가 미국 공장 증설로 반도체 수입 관세 위협을 사실상 피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대만 국가 차원에서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대만 정부는 TSMC의 미국 투자를 제한할 수 있는 권리를 앞세워 ‘문단속’을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미국에 최신 기술 도입을 막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 셈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군사적 지원을 비롯한 다른 협상카드를 앞세워 추가로 압박에 나선다면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질 수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대만에서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 약 85%의 응답자가 미국에 TSMC 2나노 공정 도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협상에서 미국이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응답도 약 60%를 기록했다. 일반 시민들도 지금의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트럼프 정부가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 협상 과정에서 대만을 사실상 중국에 넘겨주는 방안을 협상카드로 제시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전 세계 고객사들의 TSMC 미세공정 반도체 수요를 고려한다면 미국에 신설되는 공장이 이를 모두 책임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반론도 일각에서 고개를 든다.
미국이 TSMC의 투자 확대를 압박한다고 해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대만의 중요성이 크게 낮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가 대만을 상대로 얼마나 강경한 협상 전략을 앞세울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대만은 물론 세계 반도체와 IT업계에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가디언은 “TSMC의 갑작스런 미국 투자 확대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대만에 논란과 혼란을 모두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대만의 국가 안보가 풍전등화 상태에 놓였다”고 바라봤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