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꽁꽁 잠겨있던 국민의힘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 자물쇠가 서서히 열리고 있다.
한국은행와 함께 정부에서도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국민의힘을 향한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다만 추가경정 편성 규모와 시점은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사건 전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3차 변론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정치권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국민의힘은 최근 추경 편성에 대한 전향적 발언들이 늘어나면서 내부 기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더불어민주당의 추경 편성 요구에 강하게 반대해 왔다. 특히 확장 재정에 우려를 표시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이재명표 추경이라며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기조는 민주당이 지난해 11월29일 사상 처음 야당 단독으로 감액 예산안을 처리한 뒤 더욱 강해졌다.
실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로지 이재명 대표의 지역화폐 포퓰리즘 공약을 위한 이재명의 대선용 추경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당 안팎에서 추경 편성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박수민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은 21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방적으로 통과된 예산안을 조기 집행하는 데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면서도 "1분기 정도 넘어서 (추경)필요성을 보겠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23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1분기 정도에 과연 조기 집행 효과가 어떤 것인지,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예산 투입이 필요한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어떤 부분에 예산을 집중하는 것이 우리 국내총생산(GDP) 상승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판단해서 그때 가서 필요하면 추경을 하겠다는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올해 1분기는 조기 집행으로 넘긴 뒤 2분기에 추경을 편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여당이 이처럼 추경 빗장을 느슨하게 하는 데는 한국은행과 정부 쪽 기류 변화가 첫 번째 이유로 꼽힌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6일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 방향 회의에서 재정 투입을 통한 경기 부양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15조~20조 원 규모의 추경 편성을 주장했다.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경제상황 점검 및 현안 논의를 위해 서울 중구 한국은행을 방문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창용 총재는 당시 회의에서 "소비나 내수가 예상보다 많이 떨어졌고, 계엄 등 영향으로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이 0.2%를 밑돌 가능성이 있다"며 "통화정책 외에도 이를 보완하는 추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예산 집행이 우선이라던 정부가 추경 편성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등 사실상 입장을 바꾼 점이 눈에 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경제부총리도 추경이 필요하다는 쪽에 힘을 실었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16일 통화정책 방향 회의에서 "어려운 민생 지원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추가적인 재정투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정치권뿐만 아니라 지자체, 경제계 등 일선 현장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도 국민의힘에게 압박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1일 윤석열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을 여는 등 주 2회씩 2월13일까지 8차례 기일을 지정하며 재판에 속도를 내고 있다.
헌재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은 7차례, 박근혜 전 대통령은 17차례 변론을 각각 열어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탄핵 사건은 쟁점이 거의 없어 이르면 2월 말, 늦어도 3월 중순에 결론이 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 탄핵이 점차 속도를 내며 조기 대선이 가시화하는 마당에 여당도 추경 편성에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게 됐다.
여기에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 지지자들의 19일 서부지법 폭력사태 등으로 중도층이 지지를 잃고 있다. 대선 후보 지지에 있어 유보층이 많은 현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중도층을 끌어올 '재료'가 절실하다.
추경 편성은 조기 대선에 있어 '민심잡기용'으로 양당에 모두 유용한 카드다. 민주당은 정치 공세성 발언을 자제하며 추경 편성을 줄곧 주장해 왔다. 국민의힘 역시 추경 편성을 통해 민생 정당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표는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불확실성을 매듭짓고 민생 경제 회복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수립해야 될 시기"라며 "추경 등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민생'을 명분으로 계속 국민의 힘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정치권에선 국민의힘이 조기 대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추경의 규모와 시기를 결정할 공산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의 전개 양상이 궁극적으로 추경 편성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