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2025-01-10 08:30:00
확대축소
공유하기
[비즈니스포스트] 롯데그룹 최고경영진은 일년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밸류 크리에이션 미팅(VCM)’으로 불리는 이 자리는 직역하면 ‘가치 창출 회의’인데 옛 표현으로 ‘사장단 회의’라고 말하면 이해가 쉽다.
▲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사진)은 지난해를 롯데그룹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한해로 기억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뿐 아니라 롯데그룹 컨트롤타워인 롯데지주 대표이사부터 시작해 각 실장들, 주요 사업군을 책임지는 총괄대표들, 그리고 계열사 대표들이 참석한다.
외부 전문가의 강연과 각 사업군 수장의 전략발표, 신 회장의 주문과 당부가 이어지는 형태의 회의로 알려져 있다.
사실 밖으로 전해지는 얘기는 늘 비슷하다. 고강도 쇄신의 필요성이 늘 강조되며 본연의 경쟁력을 강화하되 미래를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반년마다 주기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8일 열렸던 롯데그룹의 VCM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던 것 같다.
신 회장은 VCM에서 각 계열사 대표들에게 “지금이 변화의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마지막 기회’라는 다소 비장한 어조로 강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롯데그룹에 변화가 중요한 차원을 넘어 절실한 시기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지난해는 그룹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한해였다”고 되돌아보기도 했다.
한국 롯데그룹 경영 참여한 30년 동안 IMF와 금융위기, 경영권 분쟁과 사법리스크 등 굵직한 위기를 몇 차례 더 겪었음에도 지난해를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꼽았다는 것은 그만큼 잔뼈가 굵은 오너경영인으로서도 지난해 위기가 숨이 허덕일만한 수준이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신 회장의 아들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부사장이 VCM 참석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는 점도 최근 롯데그룹의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신 부사장은 7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 CES에 참석했다. 모빌리티와 첨단 농기계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역할인 미래 먹거리 발굴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 9일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 부사장이 잠시도 쉴틈 없이 움직였다는 것은 롯데그룹이 여유를 부리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장단 분위기도 어두웠다. 취재진 질문에 통상 웃음으로 화답했던 인물들조차 모두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 회장의 비장한 언어, 신 부사장의 분주한 행보, 사장단의 굳은 표정에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12월 초,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정국’이 펼쳐지면서 재계에서는 다소 씁쓸한 우스개소리가 돌았다. 계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롯데그룹이라는 것이다.
롯데그룹은 계엄사태 전만 하더라도 롯데그룹은 유동성 위기 논란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지난해 11월 중순 지라시를 통해 번졌던 롯데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은 주력 계열사의 주가 급락 등 적지 않은 파장으로 이어졌다.
롯데그룹은 지라시에 곧바로 선을 긋고 최초 유포자를 색출하겠다며 강경대응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진짜 위기라서 저러는 거 아냐?’라는 의구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보유하고 있는 자산 규모를 공개하고, 은행권에 그룹의 상징인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내놓았지만 이를 ‘자신감’으로 보는 시선보다 ‘정말 위기구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았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롯데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은 그렇게 지난해 11월 절반을 가득 채운 이슈였는데 계염사태 이후 사람들의 눈길이 용산으로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롯데그룹이 한 숨을 돌리게 됐다는 얘기는 어딘가 씁쓸할 수밖에 없다.
현재 롯데그룹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급한 불은 끈 것으로 보인다.
▲ 롯데그룹에게 그 어느 때보다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타워 전경. <롯데그룹>
유동성 위기의 진원지로 꼽혔던 롯데케미칼은 사채권자 집회를 통해 문제가 됐던 재무적 부담을 일부 덜어냈다. 자칫 2조3천억 원의 회사채를 조기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일단 최악은 벗어난 상태라는 뜻이다.
하지만 잔불까지 껐다고 보는 이는 드물다. 유동성 위기설의 뿌리를 파고들면 롯데케미칼의 현금 창출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것이 원인인데 이를 올해 개선할 수 있다고 낙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연초 롯데케미칼 관련 분석리포트를 낸 증권사 몇 곳을 살펴보면 롯데케미칼의 영업손실이 내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신 회장이 VCM에서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외부환경이 아닌 우리 핵심사업의 경쟁력 저하다"며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로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결국 이런 상황인식 속에서 나오는 절박한 발언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이런 흐름을 놓고 롯데그룹을 '지친 거인'이라고 부르며 미래를 비관하기도 한다.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힘이 달려 결코 뛸 수 없는 거인.
앞으로 신 회장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롯데렌탈 매각으로 시작한 보유자산 매각의 속도를 높이고 주력해야 할 곳에 더 많은 고민과 시간을 할애해야만 할 것이다.
과거 잘 나갔던 기업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한순간에 쇠락하는 경우는 숱하게 많았다. 어느 기업인의 말을 빌리자면 평생 쌓은 탑이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말이다.
지난해는 롯데그룹이 비관적 분위기로 한 해를 마감했지만 올해는 희망의 신호탄을 쐈다는 얘기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끝났으면 한다. 남희헌 유통&성장기업부 부장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