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오른쪽)과 메리바라 제네럴모터스(GM)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9월 포괄적 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
[비즈니스포스트] 올해 국내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를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중국 공세’와 ‘캐즘’으로 귀결된다.
비야디(BYD) 등 원가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기존 시장 강자였던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에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29일 관련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시장 점유율을 잠식해나가는 중국 기업에 대응해 생존을 모색하는 세계 자동차 기업들은 과거의 경쟁자들과 손을 잡거나, 생존을 위한 군살빼기에 들어가는 등 '합종연횡'에 나섰다.
◆ 중국 전기차 공습에 세계 자동차 산업 '합종연횡', 내수는 '캐즘'과 ‘화재’ 에 위축
올해 세계 자동차 업계에는 중국 전기차의 공세에 맞서 기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 사이 유례없는 '합종연횡'이 벌어졌다.
중국의 친환경차 전환이 빨라지고, BYD 등 현지 자동차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판매에서 약진하면서,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은 역대급 위기를 맞았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내수 시장에서 급성장하면서 2019년만 해도 34.1%에 그쳤던 중국 토종 브랜드의 자국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50%를 넘겼다.
지난해 세계 자동차 판매 2위 폴크스바겐그룹은 최근 2030년까지 독일 내 일자리 3만5천 개 이상을 줄이는 구조조정 안을 발표했다. 독일 직원 12만 명의 약 30%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폴크스바겐은 중국에서 전년보다 0.2% 줄어든 222만7635대를 팔아 중국 전기·하이브리드차 제조업체 BYD(비야디, 257만1109대)에 판매 1위 자리를 내줬다. 앞서 폴크스바겐은 2008년 이래로 15년 동안 중국 최다 판매 브랜드 자리를 지켜왔다.
세계 자동차 판매 1위 일본 토요타그룹 역시 중국에서 고전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서 연간 170만2773대를 팔아 전년 대비 판매량이 3.8% 줄었고, 올해 1~3분기엔 45만4092대를 판매해 판매 감소율이 14.3%로 급격히 가팔라졌다.
세계 판매 4위 미국 스텔란티스도 중국 전기차 실적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1년 피아트크라이슬러오토모빌과 푸조를 보유한 PSA그룹의 합병으로 스텔란티스가 탄생할 때부터 회사를 이끌어온 카를로스 타바레스 스텔란티스 최고경영자(CEO)는 경영악화로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두고 이달 초 전격 사임하기도 했다.
중국 내 자국 전기차 브랜드 부상뿐 아니라 지난해부터 전기차 선도 업체 테슬라와 BYD가 주도한 전기차 가격 경쟁은 내연기관차를 만들어온 기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비용절감 압박 강도를 높였다.
게다가 친환경차·전기차에 부정적 인식을 지닌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정권인수팀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상 전기차 보조금 폐지, 수입차 관세 인상을 예고하는 등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자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올해 경쟁 업체와 연합전선을 펼치며 타개책 마련에 나섰다.
폴크스바겐은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과 합작법인을 설립, 총 58억 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합작법인은 이르면 2027년 리비안의 소프트웨어와 전기차 아키텍처를 적용한 첫 폭스바겐 모델을 출시할 예정이다.
현대자동차는 세계 판매 5위 GM그룹과 지난 9월 전기차·수소차 기술 공동 개발 등 포괄적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현대차는 GM과 청정 에너지 기술 관련 협력과 자동차 공동 개발·제조를 통한 비용 절감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은 세계 수소차 시장을 함께 선도하고 있는 일본 토요타그룹과 수소 분야 협업도 타진 중이다. 토요타는 이미 독일 BMW와 수소차 공동 개발에 나서며 협력을 맺었다.
세계 판매 7위 혼다와 8위 닛산은 최근 기업 합병을 전격 발표했다. 두 회사가 2026년 8월 새로 설립되는 지주회사 산하에 각각 들어가는 형태로 통합을 추진한다.
올해 내수 자동차 시장은 경기침체로 전년 대비 판매량이 감소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비싼 전기차 판매가 크게 위축됐다. 그 대안으로 하이브리드차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국내 전기차 시장은 지난해 전기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 현상 직격탄을 맞아 1.1% 역성장을 기록했으며, 올해 1~11월 7.1%로 감소세가 더 가팔라졌다.
유럽의 올해 전년 대비 전기차 판매량이 2% 줄고, 미국은 약 8%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위축세를 보인 셈이다.
▲ 전기차 성장 둔화 여파와 저가 리튬인산철(LPF)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배터리 공세 등으로 국내 배터리 3사는 올해 실적 악화에 빠졌다. 각 기업들은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비용효율화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사진은 3사의 배터리 공장 모습 <각사> |
◆ 캐즘과 중국 공세에 된서리 맞은 K-배터리, 경영효율화 집중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올해 전기차 시장 성장둔화 여파에 실적 직격탄으로 맞았고, 저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배터리 기업 약진에 세계 시장 점유율을 상당 부분 내줬다.
코너에 몰린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캐즘 이후를 기약하기 위해 비상경영을 선언, 강도 높은 자구책을 실시하고 있다.
29일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10월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의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중국 시장 제외)은 45.7%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포인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국 배터리 기업(CATL, BYD, CALB, 파라시스)의 합산 점유율은 34.4%로 2.9%포인트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데다 안정성까지 높은 LFP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그간 삼원계(NCA, NCM) 배터리에 주력한 K배터리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2023년 하반기부터 나타난 전기차 시장 성장둔화는 올해도 지속되면서 국내 배터리 3사들은 실적 악화에 빠졌다.
올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경영환경을 위기로 진단하고 자구책 마련에 들어갔다. 출범 이후 적자에 늪에서 빠져있던 SK온이 가장 먼저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SK온은 지난 7월1일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일부 임원직을 폐지하고 성과 미달시 임원 연봉동결, 임원 복리후생 제도·업무추진비 축소 등을 결정했다.
이어 2달 뒤인 9월 말에는 희망퇴직과 무급휴가 프로그램 신청을 받으며 사원레벨까지 구조조정을 확대하고 복지 축소, 출장/관리비 삭감, 주재원 복귀 등의 비용절감 조치를 실시했다.
2023년보다 줄었지만 흑자를 내고 있던 LG에너지솔루션도 올 연말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회사는 지난 10년 가운데 올해 처음으로 매출이 역성장하고, 내년에도 매출과 가동률 개선폭이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출장비 절감 △임원 조활비/교제비 축소 △연차휴가 사용 촉진 △연간 성과급 지급 규모 축소 △일부 사업을 제외한 증원 중단 등을 추진키로 했다.
삼성SDI는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비상경영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위기라는 점을 지속 강조했다. 실제 삼성SDI 임원들은 지난 4월부터 주 6일 출근을 실시 중이기도 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비상경영이 단시일 내 끝나긴 어려워 보인다.
전기차 가격 경쟁에 들어간 완성차 기업들의 LFP 배터리 채택이 점차 늘고, 전기차 대중화 걸림돌로 지목되는 △가격접근성 △충전인프라 △주행거리 △충전속도 △다양한 신차 라인업 확대 등이 단기에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재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원은 “자국 내 공급과잉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는 미국의 중국산 견제 강화로 수출시장 다변화를 강력히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유럽과 신흥국에서 중국산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어 대응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신재희·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