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장된 면은 있지만 이런 영화들에 묘사된 현실이 마냥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건 지금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세입자’는 SF, 블랙코미디, 호러가 혼종 된 색다른 독립영화다. 사진은 영화 ‘세입자’ 스틸컷의 모습. <인디스토리> |
[비즈니스포스트] ‘세입자(윤은경 감독, 2024)’는 한국 사회가 처한 주거 문제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특히 MZ세대가 느끼는 주거에 대한 불안은 공포에 가깝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대도시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젊은 세대는 급여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해야 한다.
이제 전세라는 주거 형태는 거의 사라지고 월세가 일반적인 시대가 되었다. ‘세입자’에는 월월세, 천장세라는 더욱 악화된 주거 방식이 등장한다.
대기오염과 주거난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진 미래 사회, 20대 직장인 신동은 아파트 월세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SF 장르긴 하나 도시의 풍경은 현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고 오히려 레트로 느낌의 건물과 실내 인테리어가 두드러진다. 휴대전화를 연결하면 상대방이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 등 몇몇 SF 장치가 있지만 SF 정체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현재, 이곳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시제를 미래로 바꾼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동이 살고 있는 도시는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소수의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월세로 살고 있다. 신동의 집주인은 큰손 임대 사업자인 엄마에게 사업을 물려받은 10세 정도의 소년이다.
소년 집주인이 아파트를 리모델링하겠다며 계약을 종료하려 하자 다급해진 신동은 친구에게서 들은 월월세 제도를 활용하기로 한다. 이 도시에서는 월세 임차인이 자신의 공간 일부를 다른 임차인에게 임대해 주는 월월세가 합법이다. 단, 월세 계약의 종료를 위해서는 월월세 계약까지 깔끔하게 정리돼야만 한다.
월월세 계약이 되어 있으면 집주인이 마음대로 계약을 종료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급하게 월월세 공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날 한 커플이 집을 보러 온다.
기괴한 복장에 독특한 외모를 가진 커플은 집을 둘러 본 다음 화장실에서 월월세를 살겠다고 한다. 신혼부부는 어이없어하는 신동에게 집 앞 공원 화장실이나 회사 샤워실 등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고 사정이 급한 신동은 계약을 하고 만다.
이 도시는 월월세뿐 아니라 천장세도 합법으로 아랫집 천장과 윗집 바닥 사이의 공간에 다시 월세를 주는 게 천장세이다. 건물을 지을 때 천장세를 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 세제 혜택까지 준다는 것이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면 상상 초월의 공간 활용 방식이 생겨나는 경우를 현실에서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다.
1980~90년대 홍콩 느와르의 단골 배경으로 자주 쓰였던 일명 ‘구룡성채’ 아파트는 좁은 공간에 더 많은 인원과 작업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초현실적일 정도로 괴상하게 증축된 모습을 하고 있다. 구룡성채는 1993~1994년에 철거됐지만 그 이후로도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SF영화의 시각적 디자인에 큰 영향을 줬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 기록사진에는 도시 빈민이 토굴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디스토피아를 설정한 SF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공간에 대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는 가정이 공통적이다.
‘토털 리콜’, ‘블레이드 러너’, ‘엘리시움’, ‘인타임’ 등의 SF에는 부유층과 빈곤층의 공간이 구별됐다. 아예 법적으로 출입이 통제되거나 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 안에 조성된 도시라 가난한 사람은 갈 수조차 없게 돼 있다. 혹은 빈곤층을 아예 화성으로 이주시켜 버리기도 한다.
과장된 면은 있지만 이런 영화들에 묘사된 현실이 마냥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건 지금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세입자’는 SF, 블랙코미디, 호러가 혼종된 색다른 독립영화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 해석도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앞서 다룬 ‘소공녀(전고운 감독, 2018)’와도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청년 미소는 빠듯한 수입으로 월세, 공과금, 식비를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모금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라는 자신의 취향만은 포기할 수 없어서 손바닥만 한 셋방 보증금을 빼서 유랑 생활을 시작한다.
‘소공녀’는 대학 시절 함께 했던 밴드 멤버를 차례로 찾아가는 로드무비 형식의 영화이다. 멤버들은 각자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고 그에 걸맞은 주거 형태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미소를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입자’, ‘소공녀’ 둘 다 청년세대의 주거 문제를 조명하고 있고 결말은 우울하다. 우화로 읽히는 ‘소공녀’의 결말이 씁쓸하다면, 호러로 마무리되는 ‘세입자’의 결말은 섬뜩하다. 그 사이 청년세대의 주거 상황은 무서울 정도로 나빠지고 있는 것 같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