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서 실질적 2인자다. 다만 전임들에 비해 밖으로 보이는 말은 줄이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스스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그림자 역할만 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자들과 거의 만나지 않으며 질문을 받아도 인삿말이나 '할 말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미래전략실은 군림하는 곳이 아니라 지원하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최지성의 리더십은 권력형이라기보다 관리형에 가깝다.
미래전략실장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에도 본관 입구가 아닌 주차장에 내려서 걸어갔고 다른 직원들과 동일하게 사원증을 찍고 보안게이트를 통과했다. 미래전략실의 권위주의를 내려놓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런 점에서 이학수 전 부회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엔지니어가 아닌 영업 출신으로 삼성전자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최지성이 처음이다.
삼성전자가 세계평판TV 시장 1위에 올라가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삼성전자 재직시절 내놓은 ‘보르도’ TV 시리즈를 통해 삼성전자는 34년 만에 TV 매출 세계1위를 차지했다. 당시 시장에 나와있는 TV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이었으나 와인잔을 형상화한 TV를 내놓으면서 TV업계에 획기적 변화를 몰고왔다.
휴대폰시장에서도 ‘애니콜’의 성공으로 삼성이 노키아를 추적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 탄생을 이끌어내 삼성전자를 세계1위 기업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세계시장을 돌아다니며 디지털제품을 판다고 해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삼성전자에서 4대 사업분야로 꼽히는 반도체, 모바일, TV, 디스플레이를 모두 거치며 영업부장부터 사업부장과 대표이사까지 역임한 대표적 '삼성전자맨'이다.
경영자가 된 뒤에도 현장경험을 살려 삼성전자와 계열사의 업무방향과 목표조율에 집중했다. 각 사업부장과 현장 책임자의 권한을 존중하면서 조력자 역할에 주력했다.
미래전략실장이 된 이후에도 전임자들에 비해 더욱 세밀하게 업무를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주요 임원의 오전 6시 30분 출근제도를 실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을 통한 업무지시와 피드백으로 조직 내 업무대응 속도를 높였다.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정확한 일정관리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세계 어디서나 사내 인트라넷으로 업무메일을 받는다. 어떤 사안이든 낮밤 구분없이 10분 내로 결정을 내려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싫어해 ‘독일병정’과 ‘최틀러’라는 별명이 있다.
삼성 오너 일가와 친밀한 사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보좌에 충실하며 그가 해외출장을 갔을 경우 삼성 내부를 단속하며 해외 현장업무 보고와 지시를 전달했다. 이건희 회장이 해외 VIP와 만나는 자리에도 항상 배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비서실 근무 당시 인연을 맺었다.
2009년 대표이사에 오를 때도 황창규 기술총괄 사장, 이상완 LCD총괄 사장과 대표자리를 놓고 경쟁했는데 당시 최지성의 발탁은 이재용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재용 부회장과 가장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뒤 두 사람이 서로 상의하면서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뒤에도 수시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아 이 회장의 병세를 살피고 그룹 현안을 묵묵히 보고하고 있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을 상속할 경우 최 부회장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주목한다. 삼성그룹에서 최지성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있어 이재용체제로 전환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후 최지성의 삼성그룹 내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룹의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지성 역시 자신에게 쏠리는 세간의 관심을 감안해 친인척들을 비롯한 주변인사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를 요구하고 있다.
승부사 기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반도체 기술 교재 1000페이지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 해 100만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최지성은 최근 삼성이 내놓은 간편결제 삼성페이의 글로벌시장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지성은 2016년 4월 미국 삼성페이 본사를 방문해 삼성페이 글로벌 서비스 확대방안을 논의했다. 또 삼성페이를 동남아시아에 출시하기로 하는 등 글로벌시장에서 삼성페이의 서비스 확산을 독려하고 있다.
한 삼성 임원은 이학수 전 실장과 최지성을 비교하여 “이 전 실장은 그룹 전체 살림을 이끌었다면, 최 실장 때는 그룹 중복사업 등을 조율하되 인사 등은 역할별로 나눠진 게 다르다”며 “사람 중심이 아니라 역할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7년 삼성물산 잡화수출부 잡화과로 입사한 뒤 1979년부터 삼성물산 유럽지부에서 근무하며 신발 판매 업무를 담당했다.
1981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팀 담당과장으로 승진해 4년 동안 근무했다.
1985년 프랑크푸르트 1인 사무소장으로 유럽에서 일하며 반도체를 팔기 시작했다.
1991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관리팀장으로 승진해 국내로 돌아왔다.
1992년 반도체판매사업본부 메모리수출담당을 맡았으며 1993년 삼성그룹 비서실 전략1팀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1994년 삼성전자 반도체본부 메모리판매사업부장을 맡았다.
1998년부터 삼성전자 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역임했고 2001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으로 보직을 바꿔 4년 동안 근무했다.
200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겸 무선사업부장이 된 뒤 2009년 삼성전자 DMC부문 사장 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2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됐으며 같은 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 근무 중이다.
2013년 삼성전자 사내이사에서 물러나 미래전략실 업무에 전념하고 있다.
◆ 학력
1967년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를 1년 동안 다니다 서울고등학교로 전학해 1970년 졸업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인 백은주씨와 사이에 은경씨와 서현씨 1남1녀를 두고 있다.
최은경씨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최서현씨는 고려대 공대를 나와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 상훈
1987년 제24회 무역의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6년 전자의날 훈포상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9년 한국통신학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정보통신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 포춘이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 50인’에 뽑혔다.
2011년 삼성전자가 650억 달러 수출탑을 쌓았다.
◆ 상훈
1987년 제24회 무역의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6년 전자의날 훈포상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9년 한국통신학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정보통신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 포춘이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 50인’에 뽑혔다.
2011년 삼성전자가 650억 달러 수출탑을 쌓았다.
어록
“무슨 소린지 나는 잘 모르겠다.” (2016/06/01,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제26회 호암상 시상식'에 앞서 기자들이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합병이 진행 중이냐고 묻자 평소의 과묵한 태도대로)
"가난한 나라에서 곡물이 없어서 굶주리는데 이를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게 윤리적 논쟁은 없는가." (2016/01/27, 수요사장단 회의에서 '차세대 에너지 정책과 신사업 기회'를 주제로 한 강연을 들으면서)
"안하면 아무 것도 없지만 뭉쳐서 하면 이런 행사도 잘 될 것이다." (2015/09/16, '추석 직거래장터'에서 행사 소감을 묻는 질문에)
“삼성전자 실적이 저조하다. 미래전략실이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더 열심히 뛰어달라.” (2014/07/01, 미래전략실 조회에서)
“임직원 모두 회장님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근신해 주고 사장단은 흔들림없는 경영과 함께 사건사고 예방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여 달라.” (2014/05/14, 이건희 회장 수술 뒤 첫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그룹은) 사랑받는 기업이 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절대 자만하면 안 된다.” (2013/01/02,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1분기 조례에서 임직원들에게)
“미래전략실은 (이건희 회장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계열사에 군림하지 말라.” (2012/07/02,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정례조회에서 미래전략실 임직원들에게)
“준법경영은 초일류기업의 핵심가치이며, 건강한 사회와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 공유가치다. 법과 질서를 철저히 지키고 공정한 경쟁, 투명한 거래를 저해하는 불합리한 관행과 과정을 없애야 한다.” (2012/04/02, 사내방송 최고경영자 메시지에서)
“평소 존경했던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고인은 세계 IT산업에 비전을 제시하고 혁신을 이끈 천재적 기업가였다. 그의 창조적 정신과 뛰어난 업적은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2011/10/06,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삼성전자가 정부정책에 따라 와이브로 개발하다 LTE 개발이 늦어졌다. 정부 얘기만 듣고 사업하다가 쪽박찬다는 말이 있다. (정부가 한국형 운영체제를 개발하겠다는 발표는) 너무 어이없어 말을 안 하고 있다.” (2011/09/01, IFA에서 정부가 산업을 주도하는 것을 우려하며)
“머지않아 다시 펜 입력 방식을 찾게 될 거예요.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중동처럼 한 글자를 디지털화하는데 2바이트가 필요한 언어를 쓰는 곳에서 반드시 펜을 찾게 돼 있어요.” “당장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남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곧 콘텐츠를 직접 만들겠다고 덤비게 될 것인데, 그때 반드시 펜 입력 방식이 채택될 것이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펜 입력 방식 기술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켜나갈 것이다.” (2011/03,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행사장을 찾았다가 기자들에게)
“이건희 회장의 혜안으로 전문경영인이 못하는 것을 하리라는 예상대로 지난 1년이 진행됐다.” (2011/01/06, CES2011에서 이건희 회장 경영복귀 1년을 평가하며)
“우리에게도 모토로라를 인수할 기회가 있었으나 보완적 부분이 별로 없고,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008/02/11, MWC2008에서)
“삼성전자의 목표는 노키아다. 1년내 노키아를 잡을 수 있는 변화를 주겠다.” (2007/01/28, 세계 1위 휴대폰 회사 노키아를 따라잡겠다며)
"3년 내 세계 1위 TV 업체인 소니를 따라잡겠다." (2003,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 부사장에 오르면서)
◆ 평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서 실질적 2인자다. 다만 전임들에 비해 밖으로 보이는 말은 줄이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스스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그림자 역할만 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자들과 거의 만나지 않으며 질문을 받아도 인삿말이나 '할 말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미래전략실은 군림하는 곳이 아니라 지원하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최지성의 리더십은 권력형이라기보다 관리형에 가깝다.
미래전략실장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에도 본관 입구가 아닌 주차장에 내려서 걸어갔고 다른 직원들과 동일하게 사원증을 찍고 보안게이트를 통과했다. 미래전략실의 권위주의를 내려놓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런 점에서 이학수 전 부회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엔지니어가 아닌 영업 출신으로 삼성전자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최지성이 처음이다.
삼성전자가 세계평판TV 시장 1위에 올라가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삼성전자 재직시절 내놓은 ‘보르도’ TV 시리즈를 통해 삼성전자는 34년 만에 TV 매출 세계1위를 차지했다. 당시 시장에 나와있는 TV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이었으나 와인잔을 형상화한 TV를 내놓으면서 TV업계에 획기적 변화를 몰고왔다.
휴대폰시장에서도 ‘애니콜’의 성공으로 삼성이 노키아를 추적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 탄생을 이끌어내 삼성전자를 세계1위 기업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세계시장을 돌아다니며 디지털제품을 판다고 해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삼성전자에서 4대 사업분야로 꼽히는 반도체, 모바일, TV, 디스플레이를 모두 거치며 영업부장부터 사업부장과 대표이사까지 역임한 대표적 '삼성전자맨'이다.
경영자가 된 뒤에도 현장경험을 살려 삼성전자와 계열사의 업무방향과 목표조율에 집중했다. 각 사업부장과 현장 책임자의 권한을 존중하면서 조력자 역할에 주력했다.
미래전략실장이 된 이후에도 전임자들에 비해 더욱 세밀하게 업무를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주요 임원의 오전 6시 30분 출근제도를 실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을 통한 업무지시와 피드백으로 조직 내 업무대응 속도를 높였다.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정확한 일정관리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세계 어디서나 사내 인트라넷으로 업무메일을 받는다. 어떤 사안이든 낮밤 구분없이 10분 내로 결정을 내려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싫어해 ‘독일병정’과 ‘최틀러’라는 별명이 있다.
삼성 오너 일가와 친밀한 사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보좌에 충실하며 그가 해외출장을 갔을 경우 삼성 내부를 단속하며 해외 현장업무 보고와 지시를 전달했다. 이건희 회장이 해외 VIP와 만나는 자리에도 항상 배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비서실 근무 당시 인연을 맺었다.
2009년 대표이사에 오를 때도 황창규 기술총괄 사장, 이상완 LCD총괄 사장과 대표자리를 놓고 경쟁했는데 당시 최지성의 발탁은 이재용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재용 부회장과 가장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뒤 두 사람이 서로 상의하면서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뒤에도 수시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아 이 회장의 병세를 살피고 그룹 현안을 묵묵히 보고하고 있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을 상속할 경우 최 부회장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주목한다. 삼성그룹에서 최지성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있어 이재용체제로 전환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후 최지성의 삼성그룹 내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룹의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지성 역시 자신에게 쏠리는 세간의 관심을 감안해 친인척들을 비롯한 주변인사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를 요구하고 있다.
승부사 기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반도체 기술 교재 1000페이지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 해 100만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최지성은 최근 삼성이 내놓은 간편결제 삼성페이의 글로벌시장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지성은 2016년 4월 미국 삼성페이 본사를 방문해 삼성페이 글로벌 서비스 확대방안을 논의했다. 또 삼성페이를 동남아시아에 출시하기로 하는 등 글로벌시장에서 삼성페이의 서비스 확산을 독려하고 있다.
한 삼성 임원은 이학수 전 실장과 최지성을 비교하여 “이 전 실장은 그룹 전체 살림을 이끌었다면, 최 실장 때는 그룹 중복사업 등을 조율하되 인사 등은 역할별로 나눠진 게 다르다”며 “사람 중심이 아니라 역할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 기타
삼성전자를 세계 TV시장 1위로 올린 '보르도' 시리즈는 그가 좋아하는 보르도 와인에 착안해 이름을 붙였다. 매출 1위를 거둔 뒤 이를 기념해 보르도 와인을 원샷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서울고와 서울대 출신이나 동문회에 나가지 않는다. 다만 서울고 각 교실에 TV를 기증하는 등 애교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서울대 재학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 반대투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함께 서울대 상대 운동권에서 활동한 인물로 김문수 의원과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