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전기차 업계는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가 줄어들까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대선 개표 결과가 나온 뒤 플로리다주 팜비치 행사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전기차 업계가 자칫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이 더 길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전기차에 대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인센티브 축소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는 현대자동차·기아에 불똥이 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7일 자동차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트럼프 당선으로 전기차 보조금 축소와 자동차 온실가스 배출 환경규제 완화가 예상되면서, 현대차그룹이 북미 자동차 시장에서 고전할 수 있는 데 비해 미국 정통 전기차 제조사인 테슬라와 정통 내연기관차 제조사인 GM 등이 수혜를 입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가 이끄는 공화당은 앞서 전기차(EV)를 비난하며, 바이든 정부에 의해 전기차가 소비자에 강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미국 환경보호청의 강화된 차량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철회하거나 없애겠다고 공표했다. 또 바이든 행정부의 2022년 IRA와 같이 전기차 판매 촉진을 위한 보조금 지급 제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내비쳤다.
미국 경제전문방송 씨엔비씨(CNBC)에 따르면, 미국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은 트럼프가 IRA를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렵겠지만, 행정 명령이나 다른 정책 조치로 전기차 보조금을 삭감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가 자국 자동차 생산 기업에 대한 설비투자 세액공제를 없애기보다는 현재 전기차 구매에 최대 7500달러(약 1050만 원)를 제공하는 연방 소비자 세액공제(보조금)를 대폭 축소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으로 전기차 캐즘 기간이 한층 더 길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부 교수는 “전기차 캐즘은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더라도 3~4년은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트럼프 당선으로 더 길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며 “트럼프는 친환경차·전기차 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고, 내연기관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정책으로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거대한 자동차 시장”이라며 “전기차 캐즘 장기화 흐름이 미국에서 유럽 등 세계로 번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월가에서는 트럼프 당선으로 제너럴 모터스(GM)가 큰 수혜자가 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존 머피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증권 연구원은 “GM이 트럼프 정부의 주요 수혜자가 될 것”이라며 “현재 자동차 환경규제로 전통적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탈탄소화 압박을 받으며, 전기차 포트폴리오로 빠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고 말했다.
GM은 ‘완전한 전기차 전환(All-electric future)’을 대외적으로 내걸고 있지만, 현재 전기차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연방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인센티브 혜택이 트럼프 정부에서 사라지면, GM의 전기차 사업 수익성은 악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GM은 트럼프 정부가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을 축소하면, 기존 내연기관차 판매를 늘려 수익성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의 정책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오른팔 역할을 하며 전면적으로 선거유세에 동참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트럼프 당선으로 수혜를 입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머스크는 트럼프를 위해 지난 7월부터 매달 4500만 달러(약 630억 원)씩 선거운동 자금을 지원해 공화당 최대 후원자로 등극했다. CNBC는 트럼프가 머스크를 차기 정부 예산 효율성 개선 자문위원장으로 임명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오른쪽)가 지난 10월5일(현지시각) 미국 펜실베이니아 유세 현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경제매체 인베스팅닷컴은 웨드부시 증권 보고서를 인용해 트럼프의 당선이 테슬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웨드부시 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할인과 세금, 인센티브가 철회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트럼프 당선은 전기차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테슬라에게는 잠재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압도적 판매 규모를 자랑하는 테슬라는 전기차 보조금이 없는 환경에서 오히려 더 명확한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며 “중국 전기차에 대한 관세 인상 가능성이 높아져 비야디(BYD)나 니오 같은 저렴한 중국 전기차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도 막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머스크는 자신의 X 계정에 ‘보조금을 없애세요. 그러면 테슬라에만 도움이 될 겁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호근 대덕대학교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트럼프 당선으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등 미국 전기차 산업 파이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며 “대신 중국 전기차와 같은 경쟁사 제품 진입이 힘들어져 테슬라 시장 점유율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상했다.
전기차 미국 판매 확대에 공을 들여온 현대자동차그룹은 악재를 만났다.
산업연구원(KIET)의 ‘미 대선에 따른 한국 자동차 산업의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기차 수출의 미국 비중은 45.5%에 달한다. 특히 전기차 수출은 2019~2023년 동안 연평균 수출 증가율이 56.2%에 달하며, 미국 전기차 수출은 같은 기간 연평균 88%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 현대자동차 미국 법인이 지난 8월 공개한 조지아주의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공장 전경.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홈페이지 동영상 캡처>
그룹은 120억 달러(약 16조8120억 원) 이상을 투자해 설립한 현대차그룹 메타 플랜트 아메리카(HMGMA) 공장 가동을 지난 10월 초 시작하며, 내년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GM을 제치고 확실한 2위에 오른 뒤 1위 테슬라 추격 속도를 높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룹은 조지아주 HMGMA에서 아이오닉5를 비롯해 이달 하순 세계 최초 공개 예정인 아이오닉9 등 그룹의 모든 전기차 모델을 생산해 현지 판매를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트럼트 재집권에 이같은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룹은 연 30만 대 생산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 HMGMA에서 최근 전기차 외에 하이브리드차도 생산할 수 있도록 생산라인을 일부 변경했다.
올해 8월28일 현대자동차가 국내 개최한 ‘2024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발표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룹은 앨라배마 공장(HMMA)과 기아 조지아 공장, HMGMA의 연간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소형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에도 나서는 등 중·대형차와 소형차 모두에서 하이브리드차 생산 체제를 갖춰 트럼프의 전기차 보조금 삭감 또는 철폐, 관세인상 장벽에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HMGMA는 최대 총 생산 대수의 3분의 1까지 하이브리드차를 만들 수 있도록 라인을 변경했는데, 트럼프 정책 변경에 따라 하이브리드 생산량을 더 늘릴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필수 교수는 “현대차그룹의 강점은 유연한 생산능력”이라며 “전기차 수요가 줄어든 만큼 하이브리드차를 생산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9월12일 현대차는 GM과 신차를 공동 개발·생산하고, 친환경에너지 사업에서 협력키로 했다. 이 협력이 현대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 교수는 “현대차와 GM과의 동맹은 이번 트럼프 당선 여파의 방패가 될 수 있다”며 “트럼프는 자국 산업 보호를 강조하기 때문에 (현대차는) 이 부분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