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이 처한 억압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 즉 여성에게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고 치료라는 이름 하에 현실 세계의 질서 안으로 억지로 돌아오게 하려는 역할을 맡게 될 때가 많다. < Pexels > |
[비즈니스포스트]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 정말 짜릿한 가짜뉴스라고 1초 정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직후 현실 인식이 되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꼈다.
수상 이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강 또는 그의 소설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억의 조각과 에피소드를 나누었다. 이 흐름에 나도 숟가락을 얹지 않을 수 없다. 나는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후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를 위한 변명’ 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소설 속에서 정신과 의사는 자의는 아니지만 확실히 영혜가 겪는 억압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다. 그렇기에 칼럼에서는 정신과 의사로서 해명을 하는 입장에서, 음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의 의사에 반해 그가 왜 음식을 강제 주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적었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해 말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다른 유명한 소설에서도 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과 같은 처지의 이들을 억압하는 위치에 선다. 그 소설은 바로 '82년생 김지영'이다.
소설에 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는 건, 바로 그의 진단과 치료의 대상이 되는 이가 등장한다는 뜻이겠다. 두 소설 속에서 정신과 의사는 ‘미친’ 여자를 다룬다.
여기서 잠깐. 정신질환자에게 미쳤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른바’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이야기 속 ‘미친’ 인물의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즉 “이 여자 완전히 미쳤네?” 같은 류의 반응에서 차용된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미친’ 여자는 타자화되고 억압받는 여성이 예술 속에서 묘사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술 속 ‘미친’ 상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수식어로서의 ‘미친’ 상태이다. (영화 '도그빌'에서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르는 여성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를 떠올려보라.)
다른 하나는 현대의학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명백한 정신질환을 가진 상태이다. '채식주의자'와 '82년생 김지영'에서처럼 말이다.
억압받는 여성이 결국 ‘미친’ 상태에 이르는 내용이 소설과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억압은 여성이 아플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여성은 아픈 상태가 됨으로써 그 억압의 결과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가고 발딛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은 현실 세계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될 수가 없다. 언어라는 그릇은 이미 현실 세계의 가치관과 질서를 내포한다. 내비게이션 속 정해진 길 같은 셈이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 위치의 사람은 더 이상 현실 세계의 내비게이션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억압받는 자에게는 언어가 없다. 그렇기에 현실의 언어와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다.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는 ‘미친’ 상태가 된다. 가부장제속 질서, 근대, 언어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무질서와 탈근대, 비언어의 상태로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미친’ 상태가 되어야만 힘을 얻고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비로소 귀를 기울인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음식을 거부하면서 말라가고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아무도 영혜와 영혜가 겪는 억압에 관심갖지 않았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결국 ‘미치게’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목소리를 얻을 수 있게 되고, 가부장적 질서에서는 가질 수 없던 파워를 지니게 된다. 더 나아가 공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 자리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여겨지고 예상되고 기대되었던 존재가, 기존의 언어로 도저히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불러일으켜지는 공포는 실로 생생하다.
그래서 억압받는 여성은 작품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미친’ 상태가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럴 때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이 처한 억압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 즉 여성에게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고 치료라는 이름 하에 현실 세계의 질서 안으로 억지로 돌아오게 하려는 역할을 맡게 될 때가 많다.
그러나 현실의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의 세상을 제한하는 데 그치지만은 않는다고 2016년에 이어 또 한번 변명 혹은 해명하고 싶다. 현실 세계의 질서에 속한 자로서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억압자를 맡게 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해와 고통, 현실과 비현실, 언어와 비언어,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통역자를 맡기도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결말 직전까지의 '82년생 김지영' 속 정신과 의사는 통역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자신도 때로는 왜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을 함께 해석하고,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 현실에서만큼은 정신과 의사에게 통역을 부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