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비즈니스포스트] 9월23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시내 곳곳에서는 초록빛 물결이 일렁였다. 도로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메달은 차량, 광장에는 국기 혹은 제각각 초록빛 장식을 두른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온 도시가 축제였다.

이날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기념일(National Day)이다.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네지드, 헤자즈 두 왕국을 통합해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을 선포한 1932년 9월23일을 기념한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 대형 광고판과 같이 사람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세 사람의 얼굴이 등장한다.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 함께 현재 국왕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그리고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까지 사우드 왕가 3대의 모습이다.

왕세자가 초대 국왕, 현재 국왕과 나란히 자리해 강조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어색하다. 리야드 거리에서 종종 눈에 띄는 역대 국왕 7명의 모습을 모두 모아 놓은 사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막대한 권력과 자금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미스터 에브리띵(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왕세자의 현재 위상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사우디 왕가 3대의 모습 속에 ‘비전2030’으로 대표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와 세계의 이목을 끈 네옴 시티 프로젝트의 속사정이 녹아있다.
  ◆ 사우디아라비아에 부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

사우디아라비아는 강력한 실권을 지닌 전제군주가 통치하는 국가다. 국왕은 통상적으로 총리를 겸하며 국가 행정을 주도한다.

하지만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총리는 흔히 ‘빈 살만’으로 불리는 왕세자다. 빈 살만은 국정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전 2030’이라는 국가 개조 프로젝트를 내놓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비전 2030은 ‘활기찬 사회(A Vibrant Society)’, ‘번영하는 경제(A Thriving Economy)’, ‘진취적 국가(An Ambitious Nation)’라는 3대 주요 목표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부터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는 변화를 꾀하는 국가 개조 프로젝트다. 거대한 미래형 스마트시티를 짓은 네옴 시티 프로젝트 역시 비전 2030의 일부다.

빈 살만이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굳힌 2017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여성의 운전이 허용됐고 관광비자가 발급되기 시작했다. 종교 행사 외 공연 및 공연장에서 남녀합석 허용, 대중영화 상영 허용 등 파격적 조치가 이어졌다.

빈 살만이 원하는 젊고 개방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 장소로는 리야드의 ‘블러바드 시티(Boulevard city)’와 ‘블러바드 월드(Boulevard world)’가 꼽힌다.

쇼핑은 물론 세계 각지의 명소를 따거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 각 산업을 주제로 구획이 나뉘어 볼거리 및 체험시설이 마련돼 있는 관광 명소다. 미국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 산업단체인 WWE와도 계약을 맺어 프로레슬링 투어가 펼쳐지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최한 2024년 E스포츠 월드컵이 열린 장소 역시 블러바드 시티다. 빈 살만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콜 오브 듀티’ 등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쇄된 엄격한 종교 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들이다.

현지 한국인 관계자들은 물론 현지인들까지도 “사우디아라비아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 권력을 장악한 왕세자 빈 살만, 그는 왜 사우디아라비아를 바꿀까? 

왕세자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빈 살만은 왜 사우디아라비아를 급격하게 바꾸려는 것일까? 빈 살만이라는 호칭에 실마리가 숨어 있다.

빈 살만의 정식 이름은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정식 이름이 긴 탓에 발음을 2~3음절로 줄이고 같은 이름의 다른 아랍권 인물들과 구별하려는 목적 등에서 널리 쓰이지만 사우드 왕조의 상황을 알고 보면 ‘빈 살만’이라는 호칭이 지니는 의미는 의외로 크다.

아랍권의 인물의 정식 이름에서 ‘빈’은 ‘~의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알’은 ‘~가문의’라는 뜻이다. 왕세자의 이름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로 살펴보면 사우드 가문에서 살만의 아들인 무함마드라는 의미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이 살만 국왕이고 그 아들이 왕세자인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평범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사우드아라비아에서는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을 제외하고 7대 살만 국왕까지 모두 ‘빈 압둘아지즈’들이었다.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이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라비아반도 내 여러 지역의 토후들을 통합하기 위해 각 토후 가문과 혼인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부인이 22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은 특정 토후 가문이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사망한 뒤에 손자 대로 왕위를 넘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압둘아지즈의 25남인 살만 국왕의 즉위까지는 지켜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국왕의 즉위 나이가 점점 많아졌다. 4대 칼리드 국왕부터는 국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가 60세를 넘어가기 시작했고 살만 국왕은 80세인 2015년에 이르러서야 왕위를 이어받았다.

살만 국왕으로서는 즉위 하자마자 통치보다는 후계를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생존해 있는 ‘빈 압둘아지즈’들은 모두 고령이라 다음 세대로 왕위 계승 자체는 이미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제는 ‘누구에게 왕위를 넘겨 주느냐’다.

살만 국왕은 즉위 직후 동복형제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왕세자로 세웠다. 하지만 동서고금 각 나라 왕조에서는 물론 현대 한국의 대기업 총수 일가에 이르기까지 숙질 사이는 안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살만 국왕은 조카를 왕세자로 임명하는 동시에 제2왕세자로 자신의 아들인 빈 살만을 세우며 사실상 속내를 내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안팎에서는 결국 빈 살만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꾸준히 나왔고 살만 국왕은 실제로 2017년에 6월에 빈 살만으로 왕세자를 교체했다.

공식 왕자만 7천 명이 넘고 100년 가까이 형제 상속이 이어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부자 상속 시도는 당연히 내부의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빈 살만의 대응은 신속했다. 왕세자가 된 지 반년도 안 된 2017년 11월, 이른바 ‘리츠칼튼 호텔 감금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당장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빈 살만에 대적할 세력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평가로 보인다. 하지만 수천 명에 이르는 왕족이 순순히 왕위의 부자 상속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빈 살만이 마냥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제군주가 쫓겨나 다른 이에게 자리를 넘겨준 사례는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역사의 순간에는 결국 늘 대중의 지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빈 살만도 역사의 반복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빈 살만이 왕위 상속의 정당성 문제를 돌파하고 왕족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일은 결국에는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 월드컵과 올림픽에 네옴 시티까지, 하나하나 손 놓을 수 없는 빈 살만

빈 살만이 언제 국왕 자리를 물려받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에서 가장 젊은 왕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빈 살만은 1985년생으로 아직 30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역대 7명 국왕 가운데 50대 이전에 국왕에 즉위한 사례는 없다.

마침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체 인구 가운데 30대 이하가 65%를 웃돌 정도로 젊은 나라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70~80대 국왕의 통치에 젊은 실권자의 등장이 반가울 법도 하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 등을 통한 최신 미디어 콘텐츠 소비에 익숙하다. 왕족들부터 대부분이 아랍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고 미국 등 서구권의 유명 대학에서 유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기존의 과도한 종교적 통제에 부정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빈 살만이 2018년 미국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와하비즘(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하는 등 과도한 종교적 통제를 반대하는 뜻을 꾸준히 내보이는 것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여론을 고려하지 않고는 나오기 어려운 발언으로 여겨진다.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개방적 정책을 취하고 있는 인근 아랍 국가들이 국제 사회에서 아랍권을 대표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동의 맹주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부심을 자극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랍에미리트는 최근 엑스포 유치, 마스다르 스마트시티 개발, 화성탐사선 ‘아말’ 발사 등으로 ‘아랍 최초’라는 타이틀을 다수 얻어냈다. 카타르는 아랍권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빈 살만으로서는 각종 국제행사 유치는 물론 초대형 프로젝트 추진을 통해 세계의 이목을 끌고 국민적 지지를 끌어 올리기가 절실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2030년 엑스포, 2034년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네옴 시티 프로젝트를 통해 더 라인(The Line), 트로제나(Trojena), 옥사곤(Oxagon)과 같은 초대형 도시개발 프로젝트를 내놓는 것이 결코 의미 없는 행보가 아닌 셈이다.

빈 살만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하나하나 실패해서는 안 될, 자신의 정치적 명운이 걸려있는 국가적 사업들이다.
  ◆ 네옴에 가려진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개발 수요, 위기 없는 기회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국제행사 유치를 싹쓸이하는 등 막대한 규모의 재정 지출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2022년 이후 국제유가의 하락 흐름으로 정부 재정의 적자까지 이어지면서 특히 네옴 시티 프로젝트를 놓고 비관적 전망이 늘고 있다.

다만 빈 살만의 현재 상황과 네옴 시티 프로젝트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면 처음 발표된 그대로 지어지느냐를 놓고 성패를 판단할 성질의 프로젝트는 아니라고 보인다.

공항, 도로 등 이미 네옴 시티 인근에 마련된 인프라를 볼 때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프로젝트의 속도와 규모를 조정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 성과를 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하는 위상까지 고려하면 쉽게 포기할 만한 시장은 더욱 아니다.

조민지 현대차그룹 스마트시티사업추진팀 팀장은 “4년 넘게 네옴을 오가면서 네옴 인근은 물론 타북까지 인프라가 개발되고 상업 시설이 확대되는 것을 보면 네옴 시티 프로젝트가 쉽게 멈춰질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고 본다”며 “계획 조정이야 발생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는 프로젝트의 큰 틀에서 취소되거나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동에서 스마트시티 관련 사업을 추진할 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주변 국가로 전파하는 것과 대비해 주변 국가에서 성과를 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스마트시티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비즈니스 프레젠스를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또한 네옴 시티 프로젝트를 넘어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개발 수요의 급증 가능성도 한국 기업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기회로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젊은 인구 비중이 높은 데다 출산율도 2.3 정도로 높아 자연적으로 향후 수십 년 동안 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대규모 도시개발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각종 국제행사 유치로 수도인 리야드에 지하철 등 도시 인프라 마련이 시급하다. 관련 공사의 발주가 이어질 것 역시 분명하다.

김정태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 한-사우디인프라협력센터 협력관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공투자기금(PIF)의 투자를 동반한 기가 프로젝트를 비롯해 월드컵, 엑스포 등 국제행사 준비를 위해 리야드를 중심으로 재개발 프로젝트가 활발히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과 협력 의지도 매우 높다”며 “기성세대에게는 자국의 인프라를 좋은 품질로 구축해 준 추억이 있는 나라이고, 현세대에게는 K-팝과 드라마 등으로 여행하고 싶고 알고 싶은 나라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있어 매우 호의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위험이 없는 기회는 없는 만큼 한국 기업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사업 참여를 놓고는 전향적이면서도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한국 기업에 잭팟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최근 일부 보도들처럼 네옴 시티 프로젝트 등을 사기극 정도로 치부하고 사업 참여 자체를 회피하는 것도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신중하게 현지 진출을 추진하되 얻을 수 있는 것은 얻고 미련 버릴 것은 버리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겠다”고 바라봤다. 이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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