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인천 서구 청라동 제일풍경채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발생한 벤츠 전기차 화재로 주차된 차량들이 전소된 모습.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요새 밤에 아파트 이웃 주민들한테 전화가 자주 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에 전기차 충전을 다 했으면 충전 좀 하게 차를 빼달라는 거에요. 일주일에도 서너 번 전화가 와요.”
“예전보다 저렴한 전기차가 나왔다고 해서 몇 주 전부터 알아보고 있는데, 안되겠어요. 가만히 주차해놨는데도 불이 난다고 하니 어디 무서워서 사겠어요?”
최근 만난 지인들의 전기차 관련 이야기다. 충전의 불편함, 그에 더해 충전 중 화재까지 더해 전기차를 둘러싼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까지 국내 등록된 전기차 누적 대수는 60만6610대다. 전기차 통계를 공식 집계하기 시작한 2017년 이후 약 7년 만에 60만 대를 넘은 것이다.
전기차 등록 대수는 2020년 13만4962대로 처음 10만 대를 넘기더니 지난해까지 매년 10만 대 이상 등록 수를 기록했다.
덩달아 전기차 충전기 설치 대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올해 5월까지 누적 충전기 설치 대수는 36만1163대다. 보통 10시간 가량 충전해야 하는 완속 충전기가 31만9456대로 대부분이었고, 30분 정도면 충전을 끝낼 수 있는 급속 충전기는 4만1707대에 불과했다.
보급된 충전기 중 고장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평균적으로 충전기 1대 당 2대 이상의 전기차가 충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 등에선 충전기 1대 당 3~4대가 충전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내서 전기차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판매가 가파르게 증가하다, 하반기부터 점차 수요가 줄더니 올해 들어선 판매 감소세가 뚜렷해졌다.
세계적으로 초기 전기차 시장에서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수요가 빠지고 나니, 이후엔 잘 팔리지 않는 이른바 ‘캐즘(Chasm)’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캐즘이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이 개발돼 초기 대중에 소개된 뒤, 대중화 전까지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는 현상을 말한다.
시장조사업체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6만5557대로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16.5% 감소했다. 지난해 1.1% 감소율에 비해 감소 폭이 더 커진 것이다. 이같은 전기차 판매 감소는 세계 전반적 추세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캐즘이 당초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전기차가 본격 대중화하는 데 3~4년 이상 걸릴 것이란 전망이다. 이같은 예상이 나오는 것은 전기차가 가진 근본적 문제점들 때문이다.
충전기가 부족해 충전하기 어렵고, 배터리 수명은 7~8년 정도인 데다 새 것으로 바꾸려면 2천만 원 가까운 비용이 든다.
그러니 중고차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내연기관차에 비해 차 값이 높은데, 점차 정부 구매 보조금은 줄어들고 있다.
특히 최근엔 전기차 구매를 가장 꺼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재’ 위험성이다. 리튬배터리는 기술적으로 화재에 취약하다. 한 번 불이 붙으면 1000도 가까운 열을 내고 잘 꺼지지도 않는다.
이달 1일 인천 청라동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벤츠 전기차에서 불이 나 주변 차량 140여대가 불에 타고 주민 120여명이 대피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1억 원이 넘는 이 벤츠 전기차(EQE350)에는 어이없게도 이름조차 생소한 중국산(제조사 파라시스) 배터리가 탑재됐고, 이 배터리에서 불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벤츠 전기차는 충전 중이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주차해놨는데 배터리에서 불이 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 지난 6일엔 충남 금산군의 한 주차타워에 주차 중이던 기아 전기차에서도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 6일 오전 5시 충남 금산의 주차타워에서 주차 중이던 기아 전기차에서 불이나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있다. <연합뉴스> |
전기차 화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소방청에 따르면 전기차 화재 건수는 2018년 3건에 불과했지만, 2023년 72건으로 급증했다.
6년 전부터 전기차 화재가 매년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데도, 그동안 정부와 국회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전기차 화재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법률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화재 위험이 높은 지하주차장 완속 충전기엔 소방시설 설치 의무규정조차 없다. 한 마디로 현재로선 전기차 화재에 무방비인 상태다.
수도권 주택의 70%는 공동주택, 즉 아파트다. 신축 아파트들은 대부분 지상 주차장이 없고, 지하 주차장만 갖추고 있다.
따라서 지하 주차장에 전기차 충전기 설치가 불가피하다. 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는 대부분 완속 충전기다. 이같은 완속 충전기 30만대가 과충전을 방지하는 장치가 아예 적용돼 있지 않다.
배터리 화재는 대부분 과충전에서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배터리를 100% 충전하지 말고, 90% 정도만 충전하는 게 안전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소비자가 전기차를 구매할 때 전기차에 중국 저가 배터리가 사용됐는지, 어떤 회사의 어떤 배터리가 탑재됐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차량 제원에 배터리 제조사 공개는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이미 지난해 파악해놓고도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 인천 화재 사건을 계기로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오는 12일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소방청 등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긴급회의를 열고, 내달 초까지 전기차 화재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망우보뢰(亡牛補牢),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따로 없다.
잇단 화재 사건 이후 전기차 구매 계약을 취소하거나 전기차를 아예 구매하지 않겠다고 하는 소비자들이 부쩍 늘었다.
전기차 화재 문제를 잡지 못하면 결코 전기차 대중화 시기는 오지 않는다. 전기차가 충분히 안전하다는 인식이 깔리지 않으면 전기차와 배터리 캐즘은 3~4년이 아니라 10년이 넘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기차 제조사와 배터리 제조사들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반성해야 한다. 전기차 제조사는 그동안 전기차를 팔면서 배터리를 100% 충전하지 말고, 90% 정도까지만 충전해야 안전하다는 소비자 캠페인 한 번 한 적 없다.
배터리 제조사들은 끊이지 않는 화재 위험을 없앨 수 있는 안전 기술 개발에 더 집중해야 한다. 가뜩이나 중국에 밀려 배터리 산업이 위기에 처했는데, 품질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배터리로는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선 화재 위험으로부터 소비자를 벗어나게 하는 안전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김승용 산업&IT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