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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관 시몬느 회장 <뉴시스> |
국내 패션 OEM기업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의류 유행의 변화가 빨라지고 제조와 유통을 분리하는 아웃소싱이 보편화하면서 매출도 늘고 있다.
국내 패션 OEM기업은 기술력과 자체 개발력을 갖고 있다. 고객사가 주는 대로 상품을 제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소재와 디자인 등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고객사에게 제공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들의 꿈은 당연히 ‘자체 브랜드’다. 기업 이름을 소비자들에게 알리고 기술력에 걸맞은 가격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댄다. 그래서 OEM기업들은 자체 브랜드를 출시하며 사업확장에 나선다.
하지만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를 맞는 일도 다반사다.
◆ 고객사 브랜드 기획에 참여하는 OEM기업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국내 패션 OEM기업 중에서도 독보적 위치에 서 있다.
박 회장은 오직 핸드백에만 집중해 지금의 회사를 만들었다. 그가 회사 창립 직후 도나카란뉴욕(DKNY)의 본사를 찾아 “유럽보다 30% 이상 싼 값에 똑같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해 수주계약을 따낸 일화는 유명하다.
시몬느는 현재 DKNY 외에도 코치와 셀린느 등 여러 명품 브랜드에 핸드백을 납품한다. 연간 생산량만 1800만 개로 전 세계 핸드백 시장의 8%를 차지한다. 지난해 매출은 약 8천억 원인데 영업이익은 1118억 원에 이른다.
박 회장은 시몬느 창립시기부터 독자적 디자인을 선보여 아시아 최초로 ODM방식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ODM은 소재와 디자인 등을 독자적으로 선택한 상품을 고객사에게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시몬느의 전체 제품 생산량 중 약 60%는 ODM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는 “시몬느는 단순 하청기업이 아니다”라며 “소재 개발부터 디자인과 품질관리까지 맡는다”고 말한다.
시몬느는 마크제이콥스와 마이클코어스 등 여러 명품 브랜드가 핸드백시장에 진출할 때 함께 기획을 맡기도 했다. 박 회장은 그 힘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몬느 직원 300여 명의 핸드백 관련 경험을 합치면 3500년에 이른다. 26년 동안 디자인한 가방 패턴만 16만 개다.”
이 덕분에 고객사에 투자해 수익을 얻기도 했다. 박 회장은 명품 브랜드 마이클코어스 핸드백 기획단계에 참여했고 생산물량 90%를 수주해 지금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이클코어스는 박 회장에게 지분투자를 제안했고 2011년 상장하면서 박 회장은 상당한 수익을 봤다.
세아상역과 영원무역도 소재와 디자인을 직접 개발하는 ODM의 비중을 늘려 나란히 매출 1조 원을 넘긴 기업들이다.
김웅기 세아상역 회장은 2001년 디자인연구팀을 회사에 만들어 의류OEM기업 중에서 일찍 자체 디자인 개발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 1529억 원이었던 매출이 15년 동안 10배 이상 뛰었다.
세아상역은 지난해 매출 1조5765억 원, 영업이익 681억 원을 냈다. 현재 세아상역의 연간 총생산량 중 15%는 자체 디자인한 제품이 차지한다.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은 1974년 창업 후 아웃도어 외길을 팠다. 전 세계 40여 개의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면서 원단 연구개발과 자체 디자인 확립에 나섰다. 1992년엔 ‘노스페이스’의 국내 론칭을 추진해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영원무역은 지난해 노스페이스까지 합쳐 약 1조6천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성 회장은 “새로운 섬유소재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며 “해외 브랜드 론칭이나 자체 브랜드 개발에 관심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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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태순 신성통상 회장 |
◆ 자체 브랜드를 꿈꾸다
국내 패션 OEM기업 경영자들은 대개 ‘자체 브랜드’를 시장에 내놓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는다. 한 OEM기업 관계자는 “같은 제품이 브랜드를 달면 가격이 3~4배로 뛴다”며 “그것을 보면 당연히 브랜드사업을 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자체 브랜드는 수익률과 연결된다. OEM기업은 주문생산을 받는 입장에서 싼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인건비 때문에 중국에 진출했다가 대거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기는 등 생산기지를 계속 바꿔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주상호 한국패션협회 상무는 “국내 패션 OEM기업들은 탄탄한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독자 브랜드를 운영할 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염태순 신성통상 회장은 자체 브랜드와 관련해 가장 주목받는 기업인이다. 신성통상은 갭과 아베크롬비 등의 의류를 생산하는 패션 OEM기업이다. 더불어 현재 ‘지오지아’와 ‘폴햄’ 등 8개 자체 의류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신성통상의 자체 브랜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탑텐’이다. 2012년 서울 대학로에 처음 매장을 낸 이래 지난해 전국 60여 매장에서 1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현재 명동과 신사동 가로수길 등 전국 주요상권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김금주 신성통상 탑텐사업부 이사는 “신성통상이 해외 브랜드에 1천 원짜리 제품을 공급하면 5만 원에 팔리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자체 상표를 붙여 우리 소비자에게 싸게 팔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염 회장은 탑텐의 성공에 힘입어 지난해 자체 브랜드 매장의 규모를 크게 늘렸다. 신성통상의 8개 브랜드 매장을 1100여 개까지 확보했다.
염 회장은 직접 티셔츠와 색깔양말 등 기본의류 5개를 지정해 각각 1백만 장 이상의 물량을 발매했다. 그 결과 신성통상은 지난해 5천억 원에 가까운 자체 브랜드 매출을 올렸다.
염 회장은 올해 초 “(외국 브랜드와) 1대1로 붙으면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8개 브랜드가 벌떼 같이 달려들어야 한다고 사업부장들에게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잘 만드는 의류를 쏙쏙 뽑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니 소비자들 반응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김웅기 세아상역 회장도 2007년 의류기업 나산을 인수한 뒤 인디에프로 이름을 바꾸면서 자체 브랜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디에프 안에 조이너스와 꼼빠니아 등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 9개가 포함됐다.
김 회장이 직접 인디에프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공을 들였다. 올해 인디에프의 모든 브랜드 상품을 판매하는 복합매장 ‘인디에프 갤러리’ 운영을 시작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2012년 시험적으로 론칭한 핸드백 자체 브랜드 ‘0914’를 본격적으로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2015년 9월 0914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플래그십 매장을 열고 대규모 마케팅을 펼칠 예정이다.
박 회장은 “0914는 한국에 주민등록을 둔 한국적 브랜드”라며 “브랜드 초기에 고객회사의 타깃지역과 가격대를 피해 이해상충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 자체 브랜드 도전의 수업료
그러나 모든 국내 패션 OEM기업이 자체 브랜드사업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의류 제조와 브랜드 유통은 사업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자체 브랜드가 성공한다고 해도 이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한다.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은 OEM에서 자체 브랜드로 방향을 돌렸으나 좋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박 회장은 1973년 신원그룹을 창립한 뒤 월마트 등에 의류를 납품하며 OEM으로 기업규모를 키웠다.
박 회장은 1990년 여성복 브랜드 ‘씨’와 ‘베스띠벨리’를 내놓으며 자체 브랜드사업으로 중심을 돌렸다.
박 회장은 당시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체 브랜드 시장에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신원그룹이 19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13개였던 자체 브랜드도 5개로 줄었다.
박 회장은 현재 3개 자체 브랜드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2012년 당기순손실 101억 원을 내는 등 고전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신원그룹을 버티게 하는 힘은 OEM 매출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신원그룹의 전체 사업에서 OEM이 차지하는 비중은 62% 수준이다. 총매출 7169억 원에서 OEM 부문 매출이 4411억 원이다.
박 회장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OEM 물량을 주로 생산하는 해외공장 투자를 늘리며 OEM사업에 힘을 더욱 싣고 있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실력이 쌓이면 자체 브랜드를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며 “실패 위험이 크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