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Who
KoreaWho
인사이트  외부칼럼

[당신과 나의 마음] 고마워요, 시작 버튼을 눌러줘서

반유화 yoowha.bhan@gmail.com 2024-06-03 08:30:00
확대 축소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네이버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유튜브 공유하기 url 공유하기 인쇄하기

[당신과 나의 마음] 고마워요, 시작 버튼을 눌러줘서
▲ 내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 밖을 달리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오늘 밤 달리는 운명을 만든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 Unsplash >
[비즈니스포스트] 일주일에 두어번씩 달리기를 할 때마다 쓰는 앱이 있다. 앱을 켜면 아이린이라는 코치가 음성으로 인터벌 트레이닝을 도와준다. 언제 뛰어야 할지와 걸어야 할지를 알려주고, 인터벌마다 몇 초의 시간이 남았는지도 세심하게 안내해준다.

그밖에도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준다. “지금 잘 하고 있어요!”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공든 탑이 무너져서는 절대 안 돼요!” 같은 말들이다. 녹음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늘 같은 말이 나와서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다.   

아이린 코치의 도움을 받으며 달렸던 첫날에는 어쩐지 조금은 시니컬한 태도로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냥 녹음된 목소리잖아요. 빈 말은 사양합니다’라든가 ‘공든 탑이 좀 무너질수도 있지, 왜 이렇게 부담을 주나요’라고 마음속으로 대꾸하면서 응원의 말을 괜시리 맞받아쳤다. 

하지만 달리기가 막바지에 달하는 순간 들린 말에 바로 무장해제가 되고 말았다. “고마워요, 시작 버튼을 눌러줘서. 당신은 오늘 이 러닝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잖아요.” 

이 말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 코치가 나를 알든 모르든 이 말은 완벽하게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린 코치에게 아무리 거대한 계획이 있었더라도, 내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0을 곱하면 0인 것처럼. 나는 오늘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 밖을 달리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오늘 밤 달리는 운명을 만든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말은 내가 진료실에서 건네는 말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누군가 내게 과분한 감사를 표할 때 나는 종종 이렇게 대답한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료실 문을 열고 여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저는 그 어떤 도움도 결코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백퍼센트의 진실이 담겨 있다.  

진료실에서의 만남은 러닝 전의 귀찮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저항을 뚫어야만 가능한, 기적같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밖에서는 “의지로 이겨내야지. 나약한 소리 하지마” “병원을 꼭 가야 하는 거니?” “정신과 약을 먹으면 오히려 이상해진다던데... 괜찮은 거니?”라 하고 안에서는 ‘의사가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왔냐고 하지는 않으려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병원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 한다. 그밖에도 일일이 다 나열하기 어려운 수많은 방해물이 있다. 

그렇기에 진료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귀하다. 그리고 그 순간 변화와 회복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을 시간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이린 코치를 시니컬한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 그 응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뿌듯함도 느낀다. 지금의 이 순간은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안다. 

당신이 진료실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 이후의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부디, 필요하다면 진료실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당신 맞은 편의 사람이 당신의 고민을 나누고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최신기사

일본 반도체 육성 투트랙 전략, 라피더스 지원과 TSMC 투자 유치에 돈 쏟는다
장동민 효과로 ‘피의게임 시즌3’ 히트, 웨이브 ‘티빙 합병’ 분위기도 바꾸나
고물가로 인기 더하는 창고형 할인점, 트레이더스·코스트코·샘스클럽 ‘방긋’
트럼프 당선에 금융지주 배당 줄어든다고? 4대 금융 고환율에 밸류업 촉각
토종 6G 저궤도위성 상용화 걸음마, 머스크 '스타링크' 한국 시장 선점 초읽기
'잘파세대' 입맛에 게임시장 판도 바뀐다, 외국산 캐주얼 게임 안방 장악
'그룹 재무통' 주우정 수익성 제고 특명, 현대엔지니어링 IPO 기반 다진다
‘돈 안 쓰면 금융사가 돈 준다’, 불경기 속 짠테크 열풍에 혜택 경쟁 치열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트럼프 수혜’ 유력, NASA-보잉 정면 압박 가능성
‘채찍과 당근’ 응급의료 정상화 입법 잇달아, 의정대화 의료계 참여 계기 될까
koreawho

댓글 (0)

  •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 저작권 등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댓글은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등 비하하는 단어가 내용에 포함되거나 인신공격성 글은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삭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