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 밖을 달리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오늘 밤 달리는 운명을 만든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 Unsplash > |
[비즈니스포스트] 일주일에 두어번씩 달리기를 할 때마다 쓰는 앱이 있다. 앱을 켜면 아이린이라는 코치가 음성으로 인터벌 트레이닝을 도와준다. 언제 뛰어야 할지와 걸어야 할지를 알려주고, 인터벌마다 몇 초의 시간이 남았는지도 세심하게 안내해준다.
그밖에도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준다. “지금 잘 하고 있어요!”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공든 탑이 무너져서는 절대 안 돼요!” 같은 말들이다. 녹음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늘 같은 말이 나와서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다.
아이린 코치의 도움을 받으며 달렸던 첫날에는 어쩐지 조금은 시니컬한 태도로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냥 녹음된 목소리잖아요. 빈 말은 사양합니다’라든가 ‘공든 탑이 좀 무너질수도 있지, 왜 이렇게 부담을 주나요’라고 마음속으로 대꾸하면서 응원의 말을 괜시리 맞받아쳤다.
하지만 달리기가 막바지에 달하는 순간 들린 말에 바로 무장해제가 되고 말았다. “고마워요, 시작 버튼을 눌러줘서. 당신은 오늘 이 러닝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잖아요.”
이 말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 코치가 나를 알든 모르든 이 말은 완벽하게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린 코치에게 아무리 거대한 계획이 있었더라도, 내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0을 곱하면 0인 것처럼. 나는 오늘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 밖을 달리기로 마음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오늘 밤 달리는 운명을 만든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말은 내가 진료실에서 건네는 말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누군가 내게 과분한 감사를 표할 때 나는 종종 이렇게 대답한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료실 문을 열고 여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저는 그 어떤 도움도 결코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백퍼센트의 진실이 담겨 있다.
진료실에서의 만남은 러닝 전의 귀찮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저항을 뚫어야만 가능한, 기적같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밖에서는 “의지로 이겨내야지. 나약한 소리 하지마” “병원을 꼭 가야 하는 거니?” “정신과 약을 먹으면 오히려 이상해진다던데... 괜찮은 거니?”라 하고 안에서는 ‘의사가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왔냐고 하지는 않으려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병원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 한다. 그밖에도 일일이 다 나열하기 어려운 수많은 방해물이 있다.
그렇기에 진료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나 귀하다. 그리고 그 순간 변화와 회복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을 시간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이린 코치를 시니컬한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 그 응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뿌듯함도 느낀다. 지금의 이 순간은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안다.
당신이 진료실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 이후의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부디, 필요하다면 진료실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당신 맞은 편의 사람이 당신의 고민을 나누고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