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으로 불거진 부동산 PF문제는 ESG 정책에도 교훈을 준다. 사진은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태영건설의 성수동 개발사업 부지 모습.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지난 11일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당장에 급한 불은 껐지만 건설사들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부실이 금융권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높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의 반복이다. 당시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은 단기성과를 위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고위험 부동산 PF 사업에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줬다. 결국 사업이 부실화면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건설사들이 늘어 최종적으로 31개에 달하는 저축은행이 파산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 시스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저축은행에 돈을 맡겼던 서민들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정부는 구제 금융에 27조 원 이상을 자금을 쏟아 부었고 아직도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무분별한 대출의 주체가 증권사라는 것만 바꾸면 이번 PF사태도 2011년 사태와 판박이다. 얼마 전까지 증권사들이 직원들에게 수억 원씩의 인센티브 잔치를 하고 있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 시중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해 피했던 브릿지론 시장에 증권사들이 들어와 높은 이자수익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개발사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된다. 우선 재개발 시행사가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 땅을 구매한 이후 건물의 시공을 맞을 건설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 뒤 시공 계약을 건설사의 지급보증을 바탕으로 다시 시중은행에 재개발사업 전반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는 데 이를 본 PF대출 이라고 한다.
그리고 분양 후에 받은 대금으로 대출을 갚고 남는 돈은 수익으로 가져간다. 앞서 시행사가 보증 없이 땅 구매를 위해 빌리는 돈을 ‘브릿지론’이라고 하는데 시행사는 본 PF대출을 받으면 바로 브릿지론을 갚는다.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국내 시행사의 대부분이 자기자본이 적고 담보제공 여력도 낮기 때문에 높은 이자를 요구할 수 있다. 시중은행은 브릿지론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이용해 최근 국내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고위험-고수익의 브릿지론 시장에 뛰어 들었다.
부동산 시장이 불황에 빠져 재개발 사업이 좌초되지 않는 한, 사업성 고려 없이 아무렇게나 대출해줘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누워서 돈 벌기’인 셈이다. ‘부동산 시장이 불황에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치명적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 호황이 끝없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특히 증권사 같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경기에 사이클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인센티브를 받기 전까지만 문제가 터지지 않으면 된다.
니체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실패를 경험하고, 반성하고 기억하고 잊는다. 개인의 삶에 있어 망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실패를 딛고 일어나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의 망각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다시는 유태인 학살이나 일제강점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잊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집단의 기억은 반드시 실패의 반복을 막을 ‘제도’라는 결과물로 이어져야 한다.
2008년 전세계는 1929년 경제대공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금융위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반성의 결과물이 바로 최근에는 ESG금융으로 부르는 ‘지속가능금융’과 ‘스튜어드십코드’, 즉 수탁자책무의 강화다.
ESG라는 용어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의 앞 글자를 조합해 만들어졌지만, 그 밑바탕에는 단기 성과주의 극복과 장기주의의 정착이 깔려 있는 것이다.
2008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전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월가의 금융인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성을 정말 몰랐을까?
무디스, S&P와 같은 내놓으라는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구성된 채권의 위험을 전혀 모르고 높은 신용등급을 줬을까? 당시 세계 1위 보험사였던 AIG 또한 마찬가지다. 실제 알았는지 그렇지 않은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들의 눈앞에는 투자에 따른 위험과 사회적 피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단기성과와 보상이 앞서 있었다는 점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측은지심)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 거울 뉴런의 존재를 통해 성선설의 과학적 신빙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돈이라는 사실상 모니터에 보이는 디지털화 된 숫자를 바라보며 그 쓰임에 따라 어떤 피해가 발생할 지를 생각하고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근 ESG의 위기를 말하는 이가 늘고 있다. 맞다. ESG가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위기의 근원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폭등, 경기침체전망이나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에 따른 친환경 정책의 폐기 등과 같은 외부요소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ESG가 위기를 맞고 있는 근원에는 겉으로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외치면서도 정작 내부에서는 여전히 단기성과 중심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금융기관과 기업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당시 월가의 금융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장의 단기성과가 나의 인사평가가 인센티브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기후변화가, 인권이 우리 기업이나 사회에 미치는 중장기적 영향이 눈앞에 보일 리 없다. 설령 보인다 하더라도,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ESG는 개인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집단이 구축한 제도를 통해 작동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전사차원의 인사평가나 보상체계에 ESG를 연계하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PF사태를 지켜보며, 겉으로는 매일 같이 ESG를 외치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아직도 단기성과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가진다.
ESG 자본주의와 경제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정착되면 그 혜택은 기업과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사회 모두에 돌아간다. 금융은 그 속성상 어떤 나라에서나 규제 기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금융당국에서도 이번 PF사태 자체의 해결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의 단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도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
22대 총선이 이제 80일 남짓 남았다. 각 당이 총선 공약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슈만 나열하는 수박 겉핣기식 정책이 아니라 모두가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는 자세로 보다 세밀한 ESG 정책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수석연구원
김태한 수석연구원은 2011년부터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에 재직 중이다. 국민연금법, 자본시장법, 전기사업법 등 기업과 금융기관의 ESG 및 기후변화 대응 정착을 위한 정책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환경정보공개 플랫폼인 CDP와 RE100, SBTi, PCAF 등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한국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100대 기업 ESG 담당자가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을 공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