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2023-12-29 12:31:04
확대축소
공유하기
[비즈니스포스트] 올해 유통업계는 항상 그렇듯 ‘다사다난’했다. 좋은 일도, 아쉬운 일도 모두 많았다.
고물가 기조가 이어지며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탓에 소비자 지갑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유통업체는 저마다 살 길을 찾기 위해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올 한해 유통업계에서 벌어졌던 주요 이슈들을 정리해봤다.
◆ 신선식품 새벽배송 기업 IPO 잔혹사, 이커머스 상장기업은 여전히 ‘0’
올해 초 유통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이커머스 기업 가운데 최초의 상장사가 탄생하는지 여부였다.
컬리와 오아시스가 모두 기업공개 절차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 컬리와 오아시스는 올해 초 모두 기업공개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진은 컬리 배송차량. <컬리>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기업공개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컬리는 1월4일 오후 입장자료를 보내 “글로벌 경제 상황 악화에 따른 투자 심리 위축을 고려해 코스피 상장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한국거래소에서 상장예비심사 청구서를 승인받은 지 약 4달 반만의 일이었다.
기업가치 하락이 주된 원인으로 거론됐다. 컬리는 상장을 추진하기 전 한 사모펀드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할 때 기업가치로 4조 원을 평가받았지만 올해 초 거론된 컬리의 기업가치는 1조 원대였다.
컬리는 “상장은 향후 기업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는 최적의 시점에 재추진할 예정이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상장 계획은 잡아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오아시스 역시 기업공개 시장의 한파를 넘지 못했다.
오아시스는 컬리와 달리 기업공개를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상장을 앞두고 기업설명회까지 열었으며 수요예측까지 진행했다. 수요예측에서 기대한 만큼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상장을 계획대로 추진하자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오아시스에 투자했던 사모펀드 유니슨캐피탈코리아가 상장을 진행하는 문제를 놓고 강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2월에 코스닥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오아시스 역시 현재 구체적 상장 계획을 세워두지 않고 있다.
컬리와 오아시스의 기업공개 시도 좌절은 이커머스 기업의 IPO 잔혹사라는 평가로 끝났다.
◆ ‘G마켓’ 신화 구영배, 1세대 이커머스 플랫폼 연합군 결성
올 봄에는 큐텐의 움직임이 큰 주목을 받았다.
큐텐은 지난해 9월 티몬을 전격적으로 인수하면서 국내 시장에 알려진 기업이다.
▲ 구영배 큐텐 대표이사(사진)는 '티몬-인터파크커머스-위메프' 연합군을 통해 이커머스 시장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G마켓 창업자로 잘 알려진 구영배 대표가 만든 동남아시아 기반 이커머스 기업이다.
큐텐이 티몬을 품에 안았을 때만 해도 구영배 대표가 티몬을 통해 국내 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눈들이 많았다.
과거 G마켓을 한국의 대표 이커머스 기업으로 키운 성과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려졌다는 얘기가 업계에 돌았다.
하지만 3월 말 인터파크커머스를 인수한 뒤 일주일 만인 4월 초 위메프까지 손에 넣으면서 큐텐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큐텐이 이른바 ‘티몬-인터파크커머스-위메프’의 삼각편대를 구축한 것인데 이들의 시장 점유율을 합산하면 이커머스 시장에서 무엇인가를 시도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 대표의 발빠른 행보에 ‘큐텐발 이커머스 시장 재편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티몬과 인터파크커머스, 위메프는 시장에서 점유율로 각각 한 자릿수 초반대를 기록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개별 기업으로는 승부를 내기 어렵지만 세 기업을 합쳤을 때 점유율이 최대 7~9%까지 상승한다는 점에서 유통업계의 핵심으로 불리는 구매 협상력(바잉파워)에서 힘을 낼 수 있으리라는 관측이 나왔다.
실제로 이커머스 업계 3위로 분류되는 신세계그룹의 ‘SSG닷컴-G마켓’ 연합군을 바짝 뒤쫓게 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구영배 대표의 행보는 계속 주목될 것으로 보인다.
◆ 쿠팡의 선전이 유통업계에 던진 의미, ‘이마롯쿠’ 시대에서 ‘쿠이마롯’ 시대로
2023년은 쿠팡의 선전이 돋보인 한 해이기도 했다.
쿠팡은 올해 1~3분기 내내 흑자를 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적자 탈출은 언제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던 기업이라고 보기에는 누적 영업이익 규모가 벌써 4천억 원을 훌쩍 넘는다.
▲ 쿠팡은 올해 분기마다 이마트를 매출에서 제쳤다. 유통업계의 주도권이 쿠팡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현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인식됐다. 사진은 서울 잠실 쿠팡 본사. <연합뉴스>
흑자 기조에 안착하면서 시장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평가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왔다. 대형마트의 절대강자로 여겨졌던 이마트를 제친 것은 의미가 더욱 크다.
쿠팡은 1분기에 이어 2분기, 3분기까지도 각 분기 매출에서 이마트를 모두 제쳤다. 매출은 얼마나 많은 소비자들이 그 플랫폼을 찾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인데 10년 여 동안 국내 유통시장의 중심에 서 있던 이마트가 그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쿠팡에게 넘겨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유통업계의 톱3를 가리키는 말로 ‘이마트-롯데-쿠팡’을 뜻하는 ‘이마롯쿠’ 대신 ‘쿠팡-이마트-롯데’를 뜻하는 ‘쿠이마롯’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쿠팡은 흑자 덕분에 현금흐름이 원활해지면서 다른 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배달비를 10% 상시 할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배달 앱 시장의 출혈경쟁을 다시 촉발한 것도 바로 쿠팡이츠 때문이었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늘 받았던 쿠팡플레이는 티빙과 웨이브 등이 부진한 사이 어느덧 월간활성사용자 수에서 넷플릭스에 이은 2위 플랫폼으로 도약했다.
쿠팡은 흑자 전환에도 만족하지 않고 있다.
쿠팡은 최근 명품 이커머스 기업 파페치를 5억 달러에 사들이기로 했다. 쿠팡의 약점으로 꼽히는 패션과 명품 부분에서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해석됐다. 사실상 올해 번 흑자를 모두 쏟아 붓는 셈인데 이를 통해 미래 성장동력 육성에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온라인 기업의 오프라인 진출, “고객들과 접점 더 넓히자”
이커머스 기업의 오프라인 접점 넓히기도 변화의 한 축이었다.
컬리의 ‘컬리푸드페스타’, 쿠팡의 ‘뷰티버추얼스토어’, 무신사와 W컨셉의 오프라인 매장 진출 등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었다.
▲ 올해는 이커머스 기업의 오프라인 진출도 잦았다. 사진은 컬리가 창립 8년 만에 오프라인에서 연 '컬리푸드페스타'가 열렸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이커머스 기업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 이들을 오프라인으로 나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대세가 된 온라인 기업은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실제 제품을 보지 않고 구매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대면’이 업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오프라인 유통기업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경험을 결코 줄 수 없다는 약점도 뚜렷했다.
엔데믹 시대는 이들에게 기회였다. 때로는 팝업 스토어를 통해, 때로는 축제를 통해, 때로는 오프라인 매장 직진출을 통해 고객에게 새로운 고객 경험을 선사했다.
고객들은 즉각 반응했다. 이커머스 기업들이 준비한 각 오프라인 공간마다 수백 명씩 늘어선 줄은 말로만 듣던 고객들의 이커머스 충성도를 그대로 드러내줬다.
앱 안에서만 보던 제품을 실제로 보고 만지고 체험해보면서 소비자들은 이커머스 제품에 더욱 강한 확신을 얻게 됐다. 이커머스 기업들이 기대했던 효과 그대로였다.
이커머스 기업들의 오프라인 진출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프라인 유통업체가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고객 경험에 힘을 주듯 이커머스 플랫폼들 역시 오프라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공산이 크다.
◆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대기업 유통3사는 변화와 쇄신
연말에는 대기업 유통사들의 쇄신 기조가 도드라졌다.
첫 발을 뗀 그룹은 신세계다.
▲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 대기업 유통3사는 올해 정기 임원인사에서 쇄신 의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사진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신세계그룹은 통상 10월에 실시하던 정기 임원인사를 9월에 앞당겨 진행하면서 계열사 대표 40%를 물갈이했다. 이마트와 이마트에브리데이, 이마트24 등 3개 회사를 한 명에게 통합 경영하게 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이어졌다.
11월에는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전략실을 8년 만에 개편하며 경영전략실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경영전략실 수장에는 ‘개발 전문가’로 꼽히는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이사 사장을 앉히며 변화를 꾀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직접 경영전략실 회의를 주재하며 임원들을 질책했다는 보도자료도 나왔다. 그만큼 신세계그룹 내부에서는 쇄신과 변화를 향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백화점그룹도 변화를 추구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평소 변화보다는 안정에 무게를 두고 인사를 진행하는 편이지만 올해 인사에서는 현대백화점, 현대홈쇼핑, 현대L&C, 현대퓨처넷 등 계열사 4곳의 수장을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