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을 빼돌리지 않았냐 하는 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채권단 입장에서 한진해운을 믿고 싶다.”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30일 한진해운 신규 자금지원 불가결정을 내린 뒤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앞두고 ‘알짜’ 자산을 빼돌렸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데 대해 입장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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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왼쪽) 한진그룹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이 행장은 한진그룹이 선대 회장 때부터 국내경제에 기여해 왔던 행로를 보면 이런 논란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현실은 때로 냉혹하다. 의도나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에 대해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경기조차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얼마 전 한 광고에 ‘이것은 어른들의 세계’라는 카피가 등장한 적이 있다.
의사결정의 결과가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결과에 대한 잣대는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든 경영이든,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다.
한진해운이 40년 만에 침몰하는 운명을 맞았다. 후폭풍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진해운은 31일 법정관리를 신청하기로 했다. 모든 채무가 동결된다는 얘기다. 이미 드러난 천문학적 숫자의 금융권 채무 외에도 협력사나 관련된 이들의 유무형 손실까지 합치면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모양이다.
법정관리 뒤 여러 시나리오 가운데 한진해운 핵심자산을 현대상선에 넘긴다는 얘기도 나온다. 현대상선 주가도 덩달아 뛰었다. 국적 1,2위 해운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지난해부터 나란히 구조조정 회오리에 휩싸이며 운명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것을 돌이켜보면 얄궂게 된 셈이다.
현대상선은 그나마 주인이 바뀌었어도 자율협약을 맺고 생명줄을 이어가게 됐지만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산소호흡기가 바로 떼어지게 됐다.
다시 결과론으로 돌아가서 한진해운 핵심자산은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정확한 것은 법정관리 이후 청산절차를 밟아야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한진그룹 계열사인 한진이 한진해운 유동성 위기를 지원하기 위해 잇달아 자산을 사들였다는 점에서 의구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한진은 지난해 말 한진해운이 보유한 한진해운신항만 지분 50% 전량을 1355억 원에 인수했다. 또 최근 동남아항로 일부 운영권을 621억 원에, 역시 한진해운 보유의 베트남 터미널법인 지분 21.33%를 230억 원에 사들였다. 모두 ‘알짜’ 자산으로 평가받은 것들이다.
한진해운에 긴급자금을 수혈하는 역할을 한진이 맡은 것으로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법정관리 이후 청산절차를 밟을 경우 ‘알짜’ 자산을 빼돌렸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그룹도 마찬가지다.
현대상선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자 현대그룹에서 현대엘리베이터가 나섰다. 마찬가지로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핵심 계열사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말부터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엘엔알 지분 49%를 비롯해 현대아산 지분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물론 모두 현대상선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
현대엘엔알은 서울 반얀트리호텔을 운영하는 회사로 현대상선이 애초 지분확보에 들인 돈은 441억 원인데 현대엘리베이터에 팔아넘긴 금액은 254억 원으로 절반 수준이었다. 당시 핵심자산을 헐값에 넘겼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은 물론이다.
한진은 한진칼이 지분 21.63%를 보유한 자회사로 조양호 회장도 개인적으로 지분 6.87%를 소유하고 있다. 한진칼 지분은 조양호 회장 등 오너일가가 29.52%를 들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정은 회장이 지분 8.7%를 보유해 최대주주에 올라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떨어져나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자산 가운데 일부가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높은 회사로 흡수된 셈이다.
‘알짜 자산 빼돌리기' 의혹이 지나친 음모론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국적 해운사가 국가 경제에 입힌 피해규모를 감안하면 과연 ‘믿고 싶다’는 말로 끝내기가 석연치 않은 것도 분명하다.
한진해운에 대한 채권단 결정으로 '대마불사(큰 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가 깨졌다는 말이 나돈다. 그렇다. 대마도 죽을 수 있나보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속담만큼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