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0년대 미국 네브라스카 글렌마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모습. <미국 국방부>
[비즈니스포스트] 1941년 10월20일 메리 콜크와 18명의 여성들이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군용 항공기 제조회사 글렌 마틴의 공장에 들어섰다.
마틴은 2차대전 중 하늘의 요새 B29를 만들었고 이후 록히드사와 합병돼 오늘날 다목적 전투기 F35 전투기를 생산하는 록히드마틴이 된 바로 그 회사다. 당시엔 B26 폭격기를 생산했다.
남성들만이 드나들던 살벌한 폭격기 제조공장 작업장에 여성들이 등장한 것은 처음 있는 일, 사람들이 놀란 눈을 치켜떴다. 이전에도 여성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품을 수급하거나, 서류를 다루거나 하는 공장 지원부서 직원이었을 뿐이었지 현장 직원은 아니었다. 그 곳 남자들의 놀이터, 공장에 하나도 아닌 여자 19명이 들어온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리벳건이라는 공구가 주어졌다. 당시 비행기는 리벳이라는 큰 머리 나사로 두 장의 철판을 이어 붙이는 작업이 많았는데 이 나사를 조이는 데 쓰이는 공구가 리벳건이었다. 총 대신 리벳건으로 무장한 오마하 공장의 여성들이 B26 폭격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41년 미국은 일할 사람, 정확히 말하자면 일할 남자가 없었다. 1939년 발발한 2차대전이 1940년 7월 영국 대공습으로 이어지면서 격화되자 그 해 12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병기창이 될 것'을 선언했고 1941년 3월 법적 근거인 '무기대여법'이 통과되자 미국산 무기를 본격적으로 유럽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돈은 전쟁 끝난 후 나중에 받는 것으로 하고 미국 정부 돈으로 사들인 미국산 무기를, 미국 화물선에 실어서 보내는 신박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서양을 건너던 미국산 무기는 미처 영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장되기 일쑤였다. 점령지 프랑스 항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독일 U보트 탓이었다.
미국은 물량 작전으로 맞섰다. 침몰하면 침몰하는 대로 화물선을 만들어 배를 띄웠고 전선에서 전차가 파괴되면 파괴되는 대로 전차를 만들어 유럽으로 보냈다. 조선소가 없던 곳에 수십 개의 조선소가 새로 지어졌다. 미국은 말 그대로 찍어내듯 전함과 전차, 전투기를 만들어 대항했다.
부족한 노동력이 문제였다. 풀가동 상태로 들어간 미국 전시산업은 엄청난 노동자를 필요로 했지만, 정작 일할 남자들은 공장 근무보다는 군대 징집이 우선이었다. 20만 명에 불과하던 미 육군이 불과 3년 만에 8백만 명 수준으로 급속히 확장되면서 남자들이 모두 군대에 가버린 탓이었다.
숙련 남성 공장 노동자들이 빠져 나간 그 공간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정답을 찾던 미국 제조업 남성 경영자들의 눈에 한 그룹이 눈에 들어왔다. 가정에 있는 기혼 여성을 동원하면 어떨까?
미혼 여성이나 유색 여성들은 이미 각종 서비스 직종 등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가용 인력군이 아니었다. 기혼여성들은 상당수가 가정에서 아내이자 주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해 왔던 중산층 백인 여성이었다.
당연히 회의론이 논의를 지배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중기계 업종에 속하는 폭격기 전투기 함정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한 번도 직장에 나와서 근무해 본 적도, 더구나 기계를 본 적도 없는 여성이 그 일을 맡는다는 것인가?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가정용 믹서를 다룰 수 있다면, 리벳건을 다루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다.
글렌 마틴 사장이 "여성들도 B-26 2만6천 개 부품을 잘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을 꺼내 놓자 또 다른 회사 록히드 임원 코트랜드 그로스가 거들고 나섰다. "비행기가 아무리 커도 결국 작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므로 여성들이라고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완벽할 것이다."
절실한 필요는 방법을 찾아내고 고민은 돌파구를 만들어 낸다. 미 항공업계는 이미 분업화로 고효율화를 달성한 자동차 산업계의 경험을 끌어 들였다.
누구나 간단한 교육을 받으면 수행할 수 있을 수준으로 공정이 잘게 쪼개졌고 최종 조립방식도 미리 만들어 둔 모듈을 현장에서 잇기만 하는 방식으로 전환됐다. 장비도 최대한 경량화됐다. 리벳건은 대폭 경량화 돼 여성이라도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여자들의 사연이 기폭제가 됐다. 진주만 공습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 60명이 캘리포니아 버몬트에 있는 록히드공장 등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여자들이 폭격기 공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메리 콜크 등 여성 19명이 출근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마틴 공장 여성 노동자는 2천 명으로 불어났고 미국 항공기 제조업체 근무 여성은 1942년 6만3천 명, 1943년 11월에는 전체 항공 산업 종사자의 37%인 48만6천 명에 달했다.
일이 이렇게 풀려 나가자 전시 언론과 미디어들이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신문 잡지에 늘 보였던 젊고 아리따운 여자 사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자 못지않은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건강한 여성의 모습이 등장했다.
▲ 리벳터 로지를 상징하는 포스터. <미국 국방부>
푸른 작업복에 빨강 물방울무늬 스커프를 머리에 두른 여성이 '할 수 있다(We can do it)'며 팔을 걷어 보이는 포스터(1942, 그래픽 아티스트 하워드 밀러)가 등장하더니 그 이듬해에는 아예 어깨도 떡 벌어지고 때 묻은 작업복 차림에, 리벳건 무릎에 두고, 히틀러 '나의 투쟁' 책을 발로 밟은 채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1943, 노먼 록웰)으로 발전했다.
이 그림의 도시락 통에 써있던 이름이 '로지(Rosie)'. '리벳터 로지'라는 애칭이 붙었다.
1943년 초에는 노래까지 나왔다. 제목은 역시 '리벳터 로지'. 당시 인기 포크 듀오였던 레드 에반스와 존 제이콥 로엡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비가 오든 아니든, 그녀는 늘 조립라인에 있지. 승리를 위해 일하고, 역사를 만들고 있지. 약해 보이지만 남자들보다 더 잘할 수 있어. 리벳공 로지. 남자 친구 찰리는 해병. 찰리를 지키는 건 로지.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아닌 게 아니라 미국을 지켜낸 것은 어찌 보면 이들 '로지들'이었다.
전쟁 초기 독일의 기계화 전차부대에 밀려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서부를 내 주고, 독일 U보트에 제해권까지 위협받았던 연합군이 전쟁의 추를 돌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막대한 생산력 덕분이었다.
전쟁 기간 미국은 무려 30만 대의 군용기와 8만 대의 전차, 150척이 넘는 항모를 전쟁에 투입했는데, 이 생산력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여성이었다.
미국 여성 노동자 수는 1940년 1천2백만 명에서 1944년 2천만 명으로 57%나 급증했으며, 특히 방위산업체 여성 노동자는 410만 명으로 20-34세 미혼 남성 노동자 170만 명의 거의 2.5배에 달했다.
아쉽게도 로지들의 시간은 1945년 종전이 되자 4년여 만에 막을 내렸다.
전쟁 물자를 대느라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공장이 감산에 들어갔고 전장에 나갔던 남성들이 돌아오자 로지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남자들에게 돌려주고 비워뒀던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던 정부의 말은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갈 때'로 바뀌었고, 탄탄한 체격의 로지도 신문 지상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하지만 난생 처음 대형 제조회사를 남자들과 동일한 포지션에서 경험해 본 여성들이 받은 느낌은 강력했다.
'할 수 있다'는 포스터는 사실 국가전쟁생산위원회가 여성들을 가정에서 끌어내 노동력화 하려는 의도로 제작을 지원한 관제 프로파간다성 작품이었지만 그 불순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내가 참여해 만든 무기로 가족들의 원수를 갚고, 조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뿌듯함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정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지만 공장에 남아 일을 계속한 로지들이 있었으며 가정으로 돌아간 로지들도 자랑스러운 기억을 전달하곤 했다. 그들은 자녀에게 말했다. '내가 로지였다. 내가 나라를 지켰다.'
너무 지나친 서사라는 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2차대전의 전시 제조업에 여성들이 남성 노동자와 동일한 포지션에서 일하고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효율과 성과를 올린 것은 이후 미국 여성들이 직장으로 진입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것이 대개의 평가다.
로지로서의 경험을 쌓은 여성들은 자녀들, 특히 딸들에게 현모양처 가정주부를 미래 커리어로 제시하기보다는 산업, 특히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하이테크 산업의 적극적 참여자로서의 롤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산업 지원군이나 보조자가 아닌 주도 세력으로 나설 수 있는 원천적 에너지를 공급했다.
로지들이 직장을 떠난 지 80여 년. 1세대 로지들의 자랑스러운 기억을 유전자에 새긴 2세대, 3세대 로지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1세대와 역할은 비슷하다.
위기에 빠진 조직을 구해내는 것. 2011년 이베이의 성공을 이끈 최고 경영자로 이름을 날리던 멕 휘트먼이 휴렛팩커드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고 2012년에는 구글 대변인 머리사 앤 마이어가 야후!의 최고경영자로 발탁됐다.
최근에는 미디어 기업 NBC유니버설의 광고 총괄, 린다 야카리노가 트위터의 신임 대표이사가 됐다. 1세대가 리벳건 산업 노동자로 국가를 구했다면, 2-3세대는 경영진을 지휘하는 최고 경영자로서 위기에 빠진 기업을 구해내는 일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구원투수로 여성 CEO를 투입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국에도 수입됐다.
올해만 해도 상장 이후 최초로 적자를 낸 한샘의 새 대표이사에 사모펀드(PEF) 운용사 IMM프라이빗에쿼티의 김유진 오퍼레이션즈본부 본부장이 투입됐으며 경영 위기 상태인 CJENM은 자회사 티빙의 신임 대표로 최주희 전 트렌비 비즈니스 총괄 대표를 지명했다. 이익이 반 이하로 줄어든 한국IBM의 새 CEO에는 이은주 전 삼성SDS 부사장이 임명됐다. 모두 여성이다.
남자들이 불 내 놓고 끄지는 못한 위험한 자리들이다. 끄려고 했지만 실패한 곳도 있고, 너무 뜨거워 접근이 어려웠던 곳도 있다. 안전만 놓고 본다면 불이 난 곳에 몸을 가까이 두는 것처럼 우둔한 일은 없지만 여성들은 불 끄러 그 자리에 간다.
위기에 빠진 기업의 CEO가 되는 것은 독이든 성배다. 잘만 하면 최고의 찬사를 받겠지만 실패하기 쉽고 실패하면 경력에 금이 간다. 기회는 낭떠러지 옆에 있다.
1세대 로지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여전히 남성의 그것과 같지 않다.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경력판에서 남성들과 같은 자세로 일하다가는 여성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남자들이 실패할지 모른다며 주저하는 자리에, 변화를 거부하고 원래대로 그대로 경영하다 위기를 맞은 그 자리에 여성들은 뛰어든다. 과감히 뛰어들어 기회를 만들고, 남성과는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낸다.
1세대 로지들이 집어든 리벳건도 그랬다. 그건 남성들이 두고 떠난 것이었다. 큰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1세대 로지들은 집어 들었고 성과를 만들어 냈다.
같은 전쟁이지만 아쉽게도 한국전쟁에 로지 스토리 같은 것은 없었다. 2차대전 못지 않은 치열한 전투를 겪었지만 미국과 일본 제조업이 만들어낸 무기와 장비 사용국이었지 생산국은 아니었던 한국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전쟁은 전투에 나선 용감한 남성들의 몫이었고 여성은 나설 기회가 없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기업 여성들은 웬만큼 고위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투피스 치마 근무복을 입어야 했고 그런 여직원들을 넥타이 맨 남성들이 지배했다.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는 한국 기업에 답답해하던 한국의 로지들에게 리벳건을 건네 준 것은 1990년대 외국계 기업들이었다. 대학 졸업 후 남자 동기들과 똑같이 들어간 직장에서 제복을 입어야 하는 굴욕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똑똑한 여성들이 외국계 기업으로 몰렸고 여성들은 그 곳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성장했다.
2000년대 초반 웬만큼 제조기술을 쌓은 한국 기업들이 선진 브랜드 마케팅 기법에 목말라 할 때 마케팅 전문가로서 대형 외국계 소비재 기업으로부터 영입된 여성 임원들이 바로 그 들, 외국계 기업으로 간 한국의 로지들이었다.
전쟁의 귀재 독일이 2차대전에서 결국 연합국에 무릎을 꿇은 것은 전쟁기술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미국의 생산력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많은 물자가 필요했지만 독일은 생산력을 끌어 올리지 못했다.
미국처럼 여자들을 공장에 많이 보냈다면 어쩌면 그들이 나라를 구했을 텐데 그걸 잘 못했다. 독일은 전쟁은 남자들의 몫이고 남자 기다리며 가정을 지키는 것이 순수 아리안족 여성들의 바람직한 태도라는 성 역할론에 집착했다.
최신 전차 티거가 등장했지만 독일의 생산은 1천3백여 대에 불과했다. 여자들이 나선 미국이 주력 전차 셔먼을 5만 대나 만들 동안. 진국영 커리어케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