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사진)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장담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는 여러 자리에서 두 회사의 합병을 자신해왔는데 최근 유럽연합과 미국 경쟁당국의 분위기는 조 회장의 기대와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
[비즈니스포스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 3개 나라에서 기업결합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두 곳에서 경고등이 들어왔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국내에서부터 지적됐던 사안들이 결국 해외 심사에서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조 회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낙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해외 경쟁당국의 움직임은 조 회장의 기대와 사뭇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19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미국이 연달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간심사보고서를 내놓고나 소송 등 적극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보이면서
조원태 회장의 입장도 난처한 상황에 놓인 것으로 파악된다.
현지 시각 18일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와 관련해 심의를 맡고 있는 정통한 관계자 3명의 말을 인용해 “미국 법무부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법무부는 2020년 11월부터 두 회사의 합병을 조사해왔는데 한국과 미국을 잇는 노선에서 경쟁 제한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마이크로칩과 같은 핵심 상품의 화물 운송에 대한 통제권이 한 회사에만 집중될 수 있어 공급망 탄력성을 해칠 수 있다는 점도 미국 법무부는 우려하고 있다.
이 보도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17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놓고 경쟁 제한성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중간심사보고서를 낸 지 하루 만에 전해진 소식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 얼마 남지 않다는 관측이 많았지만 현재 분위기는 심상치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대한항공은 유럽과 미국 경쟁당국의 움직임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한항공은 폴리티코 보도와 관련해 “소송 여부는 전혀 확정된 바 없으며 미국 매체가 소송 가능성을 제기한 것일 뿐이다”라며 “미국 법무부와 12일 대면미팅을 통해 (소송과 관련해)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며 향후 일정도 아직 미정이며 대한항공과 지속적으로 논의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전달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중간심사보고서를 놓고는 “2단계 기업결합 심사 규정에 의거해 진행되는 통상적 절차”라며 의미를 축소하기도 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실제로 과거 여러 항공사의 기업결합 심사를 진행할 때마다 여러 차례 부정적 내용을 담은 중간심사보고서를 냈음에도 결국 두 항공사의 합병을 승인한 적이 적지 않았다.
미국 법무부의 움직임도 아직 가시화하지 않은 만큼 미국 경쟁당국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바라보는 일부 시각은 대한항공의 내부 분위기와 온도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외 경쟁당국이 기업결합을 심사하면서 부정적 내용의 중간보고서를 내는 것은 합병을 허투루 판단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며 “하지만 최근 유럽과 미국 경쟁당국의 분위기를 놓고 ‘통상적 절차일 뿐’이라고 안일하게 바라볼 사안만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2021년 캐나다 1, 3위 항공사인 에어캐나다와 에어트랜샛의 기업결합 심사는 유럽연합이 제기했던 문제를 에어캐나다가 시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당시 유럽연합 경쟁당국은 에어캐나다가 에어트랜셋과 합병하려면 경쟁 제한성이 있는 일부 노선에 적극적 시정 조치를 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에어캐나다는 유럽연합 경쟁당국의 말대로 하면 항공사로서의 경쟁력을 대폭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아예 합병을 포기했다.
당시 트랜샛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을 통해 “에어캐나다가 유럽연합의 경쟁법 문제를 충족하기 위해 경쟁당국이 요구한 사항들을 기꺼이 양보하려고 했지만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사례만 놓고 본다면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과 합병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유럽연합과 미국 경쟁당국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고 이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대한항공이 유럽연합과 미국 경쟁당국의 우려를 충분히 해소하지 못한다면 기업결합을 승인받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조원태 회장에게도 합병을 둘러싼 부정적 난기류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조 회장은 3년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KDB산업은행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뼈대로 하는 항공운송산업 경쟁력 제고방안을 2020년 11월에 발표하면서부터다.
조 회장은 두 회사의 통합 이후 경영성과를 내지 못하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산업은행과 약속까지 하면서 두 회사의 기업결합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왔다.
여러 자리에서 합병의 정당성을 설명하기도 했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이 유럽연합과 미국 경제에 오히려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놓고 해외 경쟁당국이 제기하는 문제는 일찌감치 국내 공정거래위원회가 제기했던 문제와 동일하다. |
그는 지난해 4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한 세미나에 참석해 “대한항공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연간 여객 290만 명을 미국으로 수송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2021년 기준으로 미국 화물수송량을 90만 톤 이상으로 늘려 공급망 문제를 해소하는 데 일조해왔다”고 주장했다.
올해 3월에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최로 공정거래위원장 초청 특별 간담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 매체 기자와 만나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면서도 "하지만 잘 될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더욱 큰 문제는 국내 고객들 사이에서도 두 회사의 합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항공 관련 커뮤니티 등 온라인에서 소비자 동향을 살펴보면 두 회사의 합병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게 이득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 고객들 입장에서는 부담만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들은 최근 대한항공이 항공 마일리지 제도와 관련한 혜택을 사실상 축소 개편하려다가 철회했던 사례를 놓고 두 회사의 합병이 결코 긍정적 효과만 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소비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합병을 성사하기 위해 지금까지 인력과 자금에 썼던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과 합병하려고 할 것이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합병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며 “합병으로 일부 노선에 경쟁 구도가 없어지고 나면 몇 년 뒤부터는 당장 대한항공이 가격을 인상해도 고객들이 다른 대안을 선택할 기회가 없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이 운임을 책정할 때 사실상 경쟁사의 운임을 벤치마크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점유율 70%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노선에서는 경쟁사 운임에 15만 원을 더한 가격을 운임으로 받는다. 점유율이 50%가량이라면 경쟁 항공사와 비슷한 운임을 받고 점유율이 20% 미만이라면 경쟁사보다 5만 원가량 낮춘 가격에 표를 판다.
이를 감안하면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할 경우 유력한 경쟁자가 시장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운임 경쟁을 할 이유도 없고, 높아진 점유율을 토대로 오히려 운임을 인상할 가능성만 커진다.
대한항공은 이런 지적과 관련해 각 경쟁당국과 협의해 일부 노선의 슬롯을 포기하는 등의 실질적 조치를 통해 소비자 편익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실 유럽연합과 미국 경쟁당국, 소비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 이후 문제는 국내에서부터 일찌감치 지적됐던 사항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2년 2월22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하면서 두 회사가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 노선 일부에 경쟁 제한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당시 자료에서 미주 중복노선을 놓고 “두 회사의 합산점유율이 약 78%~100%로 경제분석 결과 (합병 이후) 가격 인상률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며 “대한항공이 조인트벤처 협약을 맺고 한국~미국 노선을 공동으로 운영해 사실상 하나의 사업자로 취급할 수 있는 델타항공을 제외하면 경쟁자가 없거나 1개 회사 뿐이다”라고 봤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병하면 인천과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애틀을 잇는 노선은 아예 합병회사가 독점하게 된다는 점도 짚었다.
경쟁 강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은 유럽 노선도 마찬가지였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중복 운영하는 유럽 노선은 모두 15개인데 이 가운데 기업결함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노선은 총 6개다.
공정위는 “6개 노선 모두 경쟁 제한성이 있다”며 “결합당사회사가 독점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노선 이외 5개 노선(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튀르키예 이스탄불)은 노선별로 각각 1개의 외항사가 경쟁하지만 점유율이 약 13%~31% 수준에 그친다”고 파악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