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엘앤에프가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해외 증설을 조만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허제홍 엘앤에프 이사회 의장(새로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2차전지 시장의 높은 성장세에 발맞춰 양극재사업을 확대할 기반을 마련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증설에 필요한 외부자금을 조달하면서 지배력 약화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 엘앤에프가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해외 증설을 조만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오너인 허제홍 이사회 의장(사진)의 엘앤에프 지배력 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21일 배터리업계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엘앤에프가 자금조달 일정을 구체화하며 그동안 보완해야 할 부분으로 지목됐던 고객 다변화와 밸류체인 강화를 위한 증설 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엘앤에프 이사회는 5억 달러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기로 전날 결정하고 이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시설 투자 등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 교환사채의 자금 납입은 26일 이뤄지며 만기일은 2030년 4월26일이다.
교환사채는 싱가포르증권거래소를 통해 달러화를 기준으로 발행되는 만큼 이번에 조달하는 금액은 주로 해외 투자에 활용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엘앤에프의 주력 제품인 양극재는 2차전지 원가의 40~50%를 차지하는 핵심소재다. 전기차 보급률 확대에 따라 2차전지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엘앤에프 역시 생산능력 확충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국내 생산 중심인 엘앤에프는 고객사 다변화를 위해 증설 계획에서 해외 지역별 투자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최근 양극재 제조사와 양극재의 수요처인 셀 제조사, 전기차 제조사가 서로 합작사를 꾸리는 등 밸류체인별 기업들 사이 연계된 증설 움직임도 많아지고 있어서다.
양극재 제조뿐 아니라 양극재의 전단계(업스트림) 소재인 전구체 등에 대한 투자도 필요한 상황이다. 엘앤에프는 자회사 JH케미칼을 통해 전구체를 공급받고 있지만 물량이 부족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문에 외부 자금조달을 통해 양극재 밸류체인을 강화하는 투자도 진행할 수 있다.
다만 엘앤에프가 투자에 필요한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너의 지배력 약화가 수반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엘앤에프는 허제홍 이사회 의장과 허제현 부사장 등 범GS가문 오너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LG그룹 창업에 공동 참여하기도 했던 허만정 GS그룹 창업주의 증손자다.
이들은 엘앤에프의 최대주주인 전자부품회사 새로닉스(엘앤에프 지분율 14.40%)를 중심으로 엘앤에프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허제홍 의장과 허제현 부사장은 새로닉스 지분을 각각 21.04%, 14.06% 들고 있다. 허 의장과 허 부사장은 새로닉스에서도 각각 대표이사와 부사장을 맡고 있다.
엘앤에프의 급속한 성장세로 오너 일가의 재산 가치도 급격히 늘어났다.
엘앤에프의 주가 상승분이 최대주주인 새로닉스 주가에 반영됐을 뿐 아니라 허 의장과 허 부사장이 직접 보유한 엘앤에프 지분도 각각 2% 1.58%에 이른다.
최근 블룸버그는 한국 전기차 부품·소재 기업 오너들의 급격한 재산 증식 사례로 허 의장을 조명하기도 했다. 블룸버그 억만장자지수에 따르면 허 의장과 특수관계인들의 순자산은 8억 달러를 넘었다.
앞으로 엘앤에프가 증설을 비롯한 투자를 진행하고 2차전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수록 허 의장이 누릴 과실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허 의장과 오너 일가의 엘앤에프 지배력이 그리 확고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새로닉스와 허제홍 의장, 허제현 부사장 등을 비롯한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23.87%다. 적은 지분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배력이 단단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앞으로도 추가 투자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외부 자금조달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는데 차입이 아닌 외부 자금조달은 지배력 약화를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번에 교환사채를 통해 자금조달을 진행하는 것도 지배력이 훼손될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교환사채는 이자율이 일반 회사채보다 낮은 대신 투자자가 보유한 채권을 일정시일 경과 뒤 발행회사가 보유 중인 유가증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채다. 보통 발행회사가 지닌 다른 회사 유가증권을 교환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엘엔에프가 발행하는 교환사채에는 엘앤에프 자사주를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어 있다.
교환사채는 사채권자가 추후 주식으로 교환하면 사채가 없어져 부채 부담은 줄어들고 전환사채와 달리 증자 없이 보유하고 있는 유가증권(엘엔에프의 사례는 자사주)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엘앤에프는 성장세가 가파른 만큼 사채권자가 주식으로 교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차피 자사주는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력 측면에서는 중요성이 떨어지는 만큼 자사주를 교환 자산으로 설정한 교환사채 발행은 오너로서는 가장 효과적 자금조달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엘앤에프는 투자에 필요한 자금 소요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외부 자금을 수혈해야 할 일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환사채를 발행하면 주식 총수는 늘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인 지분율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외부 자금조달은 결국 일정부분 지배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엘앤에프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273만8611주(7.6%)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번 교환사채 발행으로 자사주 151만3010주(4.20%)가 교환대상이 됐다. 사채권자가 주식으로 교환하면 허 의장으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주요 주주가 등장할 수 있는 셈이다.
엘앤에프처럼 오너 지배력이 약한 다른 기업들에서 지배구조 관련 사안들이 쟁점화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일례로 DB하이텍은 지주사 DB를 비롯한 오너 우호지분이 17.8%인데 소액주주연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바 있다. 최근에는 일명 ‘강성부 펀드’로 알려진 행동주의 사모펀드운용사 KCGI가 DB하이텍 지분 7.05%를 취득하며 경영권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가능성도 떠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대주주 새로닉스를 비롯한 우호세력이 엘앤에프의 지분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는 있다.
다만 새로닉스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금·현금성자산이 85억 원에 불과하다. 전체 자산 3482억 원 가운데 상당부분(2481억 원)이 엘앤에프를 비롯한 관계회사의 지분가치다. 새로닉스가 추가로 엘앤에프 지분을 확대할 여력은 적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허 의장은 앞으로도 기업 지배력과 관련한 문제를 계속 고민하며 투자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용욱 한화증권 연구원은 “엘앤에프가 이번 교환사채 발행으로 자금에 여유가 생기며 지역별 투자계획도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엘앤에프가 다른 양극재 경쟁사와 비교해 저평가되고 있지만 고객사 확대와 양극재 소재 투자가 구체화할수록 저평가가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바라봤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