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사실상 이재용체제로 전환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삼성의 얼굴’을 넘어 삼성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얼마 전 영업이익 7조 원대의 2분기 잠정실적을 내놓았다. 위기라는 진단이 나왔고 이재용체제의 미래를 놓고 시선이 집중됐다.
이재용체제, 삼성은 어디로 갈까?
몇 차례에 나눠 이재용체제를 긴급히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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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편법승계'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회적 정당성을 얻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뉴시스> |
이재용체제는 삼성의 미래다.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래로 나아가는 길에서 주춤하는 것은 삼성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발목을 잡는 과거들이 있다. 경영능력과 관련해서 e삼성의 실패가 있고 개인적으로 이혼도 있다.
삼성그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삼성이라는 거인을 이끌 총수로서 이혼은 이 부회장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라며 “이혼으로 이 부회장은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 ‘수신제가 평천하’라는 인식이 아직도 뿌리 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거는 이 부회장이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이재용체제의 발목을 잡을 결정적 과거는 아니다.
하지만 ‘편법승계’는 다르다. 편법승계는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인수를 통해 에버랜드의 지분을 확보한 것을 말한다. 이는 이재용체제의 정당성을 다투는 사안이다.
이재용체제는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지분을 물려받아 삼성그룹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한편 삼성그룹의 회장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 부회장은 이미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최대주주다. 이 부회장은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I 주식을 매각해 언제든지 4조 원 정도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재용체제의 공식출범을 선언할 수 있는 이 토대의 뿌리가 바로 편법승계다. 이 때문에 편법승계에서 이 부회장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정당성 시비는 계속 따라다닐 수밖에 없고 이재용체제는 끊임없이 바람을 타게 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지난 달 초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삼성의 과거는 끝났으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 소장이 말한 과거는 물론 지분의 편법승계를 말한다. 미래는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완성하려면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는 지을 수 없지만 만회는 가능하다. 어느 정도 씻어낼 수는 있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은 이병철 창업주가 일궜고 이 회장이 부흥시켰지만 국민이 함께 키운 국민기업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재용체제의 미래는 국민적 합의를 얼마나 이끌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재용체제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 상속세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이 부회장이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백화제방처럼 쏟아졌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지분 3.88%와 삼성생명 지분 20.76%를 기반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했다. 이 가치는 12조 원 정도다. 이재용 부회장이 이 지분을 물려받으려면 줄잡아 6조 원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 부회장으로서 엄청난 부담인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나온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는 이 세금에 대한 부담을 어떻게 줄이면서 경영권을 승계받을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삼성에버랜드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안이라든지, 삼성전자를 분할해 삼성에버랜드와 합병한다든지 하는 방안들이 모두 그렇다. 이런 논의의 출발은 이 부회장이 가장 효과적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편법승계나 마찬가지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지분 가운데 일부를 삼성문화재단 등 삼성의 공익재단에 출연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공익재단에 출연할 경우 일정 수준에서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지난 달 20일 삼성생명 지분 2.5%를 매각해 5천억 원을 마련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들은 이 재단이 앞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여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그룹 지배권 강화를 위한 우호지분을 만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편법승계라는 논란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오히려 편법승계의 과거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 같은 대기업은 기업 자체 또는 그 소유관계에 대해 사회적 승인을 받지 못하면 계속 견제받을 수밖에 없다”며 “에버랜드 전환사채사건이 법률상 마무리됐지만 사회적 논란까지 종결된 것은 아닌데 이재용체제에서 또 다시 편법승계 논란을 만드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에서도 이런 우려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상속세 문제는 재단출연 등을 통해 회피하지 않고 정당하게 낼 것은 다 내는 원칙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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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 <뉴시스> |
◆ 이재용체제의 정당성을 함께 고민하는 한국사회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지난달 17일 경향신문 칼럼에서 이 부회장에게 지주회사를 만들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는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구조를 유지하면서 3세 시대를 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간접지배하는 것은 은둔의 제왕 이건희 회장 시절이나 용납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사건의 추억을 끝없이 환기하면서, 보험계약자의 돈을 그룹 지배에 악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계속 들으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국민과 시장으로부터 존경받는 CEO가 되는 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 소장의 지적은 “이재용체제에서도 삼성그룹은 현 구조 그대로 간다”는 말이 미래전략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데 대한 ‘충고’다. 이재용체제가 편법승계라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미래로 거듭나려면 그 길이 어렵더라도 지주사 전환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는 지난 달 23일 주간지 시사인과 인터뷰에서 ‘삼성법’을 따로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삼성그룹에 한해 순환출자 금지법이나 금산분리법 등 경영권 승계에 문제가 되는 규제 적용에 예외를 두는 대신 국가가 삼성그룹 경영에 일정 부분 개입해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도 삼성에 대해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봤다. 그는 “삼성그룹은 단기주주의 압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자금을 (장기적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다”며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를 보장해 주는 것이 더 민주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그 대신 국세청이 이건희 회장의 상속세를 삼성전자 주식으로 받아 현재 삼성전자 지분을 7.71%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에게 인도하는 방법을 고려하자고 제안했다. 이재용 부회장을 삼성의 최고경영자(CEO)로 삼는 대신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를 국민연금공단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장 교수는 “국민경제 관점에서 삼성(그룹의 승계) 문제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며 “필요한 경우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독일의 ‘폭스바겐법’을 들었다. 폭스바겐 지분 19%를 보유하고 있는 독일 니더작센 주정부는 경영권에 영향이 갈 정도로 폭스바겐 주식이 대량거래될 경우 이를 규제할 수 있다. 폭스바겐을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 개입할 권리도 지니고 있다.
장 교수는 이런 방안이 삼성그룹을 국영기업처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폭스바겐뿐 아니라 프랑스 자동차기업 르노도 의결권의 30%를 정부가 보유하고 있으나 국영기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섧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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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달 4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 경제통상포럼에 참석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
◆ 이재용체제는 한국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
삼성은 한국의 ‘국민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삼성그룹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워낙 크다. 삼성그룹은 2012년 매출 기준으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3%를 차지한다. 2위 현대차그룹의 비중 12%의 2배에 가까운 수치다.
특히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다. 지난 1분기 12월 결산 상장법인 502곳 중 삼성전자가 낸 순이익은 7조5744억 원으로 전체 순이익의 39.5%를 차지한다. 영업이익도 5조8762억 원으로 전체 영업이익 중 33.5%다.
이건희 회장도 국민기업 이미지를 어떻게 얻을 것인지 고민했다. 그는 평소 “삼성그룹도 100년 동안 영속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며 스웨덴 국민기업 발렌베리그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발렌베리그룹은 150년 동안 이어진 재벌기업으로 스웨덴의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오너인 발렌베리가문은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이재용체제에서 편법승계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방안은 삼성이 국민기업이라는 이름을 얻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즉 삼성이 얻는 이익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삼성도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지난 해 사내 사회공헌활동 조직을 각 계열사 CEO 직속으로 배치했다. 그룹 내 사회봉사단 활동을 CEO가 직접 챙기도록 했다. 지난 해 말 기준으로 삼성그룹 내 사회봉사단은 4400여개에 이르며 총 210만 시간의 봉사활동을 벌였다. 이 활동에 투입된 예산은 연간 4천억 원 수준이다.
최근 삼성은 사회공헌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올해 핵심 경영전략 중 하나를 ‘공유가치창출(CSV)’로 잡았다. 공유가치창출은 기업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윤을 함께 만드는 것을 뜻한다. 삼성은 사장단 전원을 대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교육을 하기도 했다.
삼성이 올해 배정한 공유가치창출 사업 예산만 해도 2조 원 이상이다. 이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팀장은 “삼성은 공유가치창출을 많이 연구하고 있다”며 “사업기회와 경영에 접목시켜 결실을 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삼성 계열사 감사보고서를 통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삼성 계열사의 법인세 현황을 분석해 내놓았다.
이 기간에 삼성 36개 계열사의 순이익은 103조7160억 원에 이른다. 전체 법인의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3%다. 그러나 이 기간에 기업회계상 법인세 비용은 12조4천억 원, 세무신고상 법인세 부담액은 19조6천억원에 그쳤다. 전체 법인의 기업회계상 법인세 비용 가운데 8.4%에 그친다. 이익에 비해 세금은 터무니없이 적게 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상당한 세금감면 혜택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가 2008년부터 5년 동안 공시한 세액공제금액은 6조7113억 원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부담한 법인세 비용 7조8435억 원의 86%에 이른다.
박 의원은 “삼성이 돈을 잘 벌고 있는 데도 세금은 훨씬 적게 부담하고 있다”며 “임시투자세액공제나 연구개발세액공제 등 공제감면의 혜택이 편중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핀란드 국민기업이라고 불리던 노키아와 극명하게 비교된다.
노키아는 일반 휴대전화(피처폰) 1위였던 2006년 핀란드 전체 국가예산보다 더 많은 매출을 기록했다. 노키아는 최대 세율 60%에 이르는 핀란드 세제에 따라 이익을 국가사회에 환원했다. 2007년 핀란드 정부가 당시 국가예산 396억 유로의 3.2%를 노키아 한 곳에서 거뒀다.
2008년 6월 방한했던 페카 사우리 헬싱키 부시장은 “노키아를 위해 특별히 세금감면이나 다른 행정적 절차를 생략하는 등의 편의는 한 번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