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원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CIO)이 27일 오후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에서 열린 기자들과 취임 상견례 자리에서 취임소감을 말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자본시장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기금운용본부장이 운용하는 투자 자금이 900조 원에 이르기 때문이죠. 내년 대한민국 정부의 전체 예산이 639조 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의 투자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국민연금의 투자 자금은 세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입니다. 일본과 노르웨이 연기금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을 2년간 맡게 된 서원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CIO)은 취임 첫 날인 27일 국내 기업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할 말한 발언을 내놨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의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안정적 수익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수탁자 책임 활동을 강화하겠다는 것입니다.
10여 분 남짓 진행된 기자간담회의 절 반 가까운 시간을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발언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서 본부장이 이 대목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맞을 때마다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기업의 경영권을 간섭한다는 재계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행동반경은 그다지 넓지 못했습니다.
국민연금은 올해 3월 국내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 시준에서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의 대기업 계열사를 대상으로 531건의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반대 의견을 낸 의결권 행사는 78건으로 전체 의결권 행사 건수 가운데 14.7% 수준에 그쳤고 대부분 이사의 보수나 선임과 관련된 안건에 국한됐습니다.
하지만 나날이 대내외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에 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민연금도 ESG의 하나인 ‘지배구조’ 문제를 앞세워 주주권 행사를 강화할 명분을 쥐게 됩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8일 열린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건강한 지배구조 구축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서 본부장은 이날 국민연금의 수탁자 책임 강화를 강조하면서 KT와 포스코를 꼭 짚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KT와 포스크는 공통점이 있는 회사입니다.
공기업에서 출발해 민영화됐지만 국가기간산업에 해당하는 사업들을 해오고 있어 아직까지도 ‘국민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공통점도 있습니다.
바로 ‘주인 없는 대기업’이라는 점입니다. 민영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지분을 여러 대주주가 지분을 나눠 가지면서 흔히 말하는 특정 오너가 소유하는 기업과는 다른 지배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국가기간산업을 영위하는 공적 성격을 가졌지만 회사의 주인이 없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강화된 주주권을 시범적으로 행사하기는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부담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서 본부장이 KT와 포스코를 지목한 것을 놓고 정부가 기업 경영에 지나친 개입을 하려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는 시선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들고 있는 국내 기업이 281곳에 이르는 데 정작 문제가 많은 곳들은 제쳐두고 다루기에 가장 '만만한' 곳으로 여겨지는 KT와 포스코를 타깃으로 골라잡았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대내외적 경제 여건이 어려운 때에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KT와 포스코의 지배구조를 흔든다면 위축된 기업 경영을 한층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말도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나 최근 민간 금융회사 인사를 앞두고
김주현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발언으로 '관치' 논란이 일고 있는 때에 서 본부장의 말은 이러한 오해를 살만한 소지가 다분해 보입니다.
서 본부장이 이런 오해를 떨쳐내고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KT와 포스코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많은 지분을 들고 있는 회사들을 상대로도 주주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서 본부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의무)를 통해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고 CIO(기금운용본부장)에게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에 대해 요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김 이사장과 서 본부장이 이래저래 수탁자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강한 발언을 쏟아낸 이상 재계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두고 ‘종이호랑이’라는 비아냥을 피해갈 수 있을지를 지켜볼 일입니다. 조승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