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한국이 ESG워싱에 제대로 대응하고 세계의 ESG 흐름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민간 ESG 평가시장이 발전해 한국 사정에 맞춘 기준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복합화력발전 지원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금융일까?
‘2022 한국 ESG금융 백서’에 따르면 한 금융회사는 복합화력발전사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사회경제적 발전 및 기반 지원’, 즉 ESG금융으로 분류해 보고했다.
그러나 주민 여론은 다르다.
사천남해하동환경운동연합은 11월2일 기자회견을 열고 “하동군과 한국남동발전은 LNG(액화천연가스)발전이 친환경이라 홍보하고 있으나 석탄발전의 70%에 달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인천녹색연합은 정부가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LNG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서인천복합화력발전소 폐쇄’ 계획을 넣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여기서 이 단체는 “석탄을 LNG로 전환하는 게 온실가스 감축에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온실가스 배출로 환경(E) 성과를 끌어내리는 사업을 사회(S) 성과가 높은 사업인 것처럼 보고하는 것. 이건 전형적인 ESG워싱 기법이다. ESG 성과가 아닌데 성과인 것처럼 보이게 ‘세탁(washing)’된 경제활동이다.
국내 ESG금융 규모가 2021년 기준으로 786조9천억 원을 돌파하면서 ESG워싱 사례도 늘고 있다.
‘2022 한국 ESG금융 백서’는 ESG투자를 제외한 나머지 ESG금융 유형 즉 대출, 금융상품, 채권발행에서 사회(S) 관련 금융활동이 73%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ESG금융이 ESG워싱 수단으로 변질”되는 데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원래 ESG금융의 목적은 금융기관의 중장기적 리스크 관리, 그리고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에 대한 자본 공급에 있다. ESG워싱이 일어나면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비즈니스포스트는 16년 동안 ESG평가로 한 길을 걸어온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에게 ESG워싱 방지책과 ESG 발전 방향에 관해 물었다.
남산스퀘어 22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창밖의 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밝고 안락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ESG 분야별 연구원 21명 등 모두 28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서스틴베스트는 2006년 설립됐다. 이후 기업의 지속가능성 평가모델 'ESG밸류'를 개발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사회책임투자(SRI) 위탁운용자금을 유치했다. 여러 운용사의 ESG펀드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했다.
서스틴베스트에 따르면, 국내 ESG 기반 주식투자 중 80%가량이 서스틴베스트 평가를 참조하고 있다.
▲ 류영재 대표가 서스틴베스트 사무실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인터뷰를 하며 ESG워싱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 연기금 투자를 장기 수익률로 평가해야 ESG워싱 막을 수 있어
류 대표는 한국에서 ESG워싱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를 놓고 “해외에서 ESG는 원래 사회책임투자(SRI)를 하는 기관투자자들이 CSR워싱, 그린워싱을 잡으려고 시작한 것”이라며 “그런데 한국 기관투자자들이 사회책임투자에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
ESG워싱을 방지하기 위한 첫째 해법은 ESG 관점의 장기 투자자를 늘리는 것이다.
류 대표는 “기업이 ESG 제대로 하려면 ESG 관련 인력 고용 등 비용이 늘어나 단기적으로 실적 악화는 불가피하다”며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ESG를 통해 리스크를 줄이면서 실적이 호전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장기 투자자가 될 수 있는 기관투자자는 연기금이다.
그러나 한국의 연기금들은 장기 투자가 어렵다. 운용실적에 대한 평가를 1년 단위로 받기 때문이다. 어느 직장인이 자신의 성과지표 대신 철학을 지키는 모험을 감내할 것인가.
류 대표는 "연기금의 핵심성과지표(KPI)를 장기로 바꿔야 한다"며 10년 수익률 기준으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캐나다연금투자(CPPI)를 예로 들었다.
캐나다 최대의 연기금 운용기관인 캐나다연금투자는 2007년 장기투자로 성과를 평가해달라고 선언했다. 그 후, 2008년 금융위기가 왔다.
류 대표는 “캐나다연금투자의 자산가치는 한 때 20% 가까이 떨어졌다”며 “한국이었다면 여론이 들끓었을 것지만 다들 원칙을 지켜줬고 최근 캐나다연금투자는 연 평균 10%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금의 장기적 투자가 이뤄지려면 운용본부장의 철학도 중요하다.
류 대표는 “일반적으로 ESG투자 성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ESG요소를 고려해 투자하는 것이 시장을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 단기적인 언더퍼폼(시장 수익률 하회)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로 그는 현재 테슬라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일본의 미즈노 히로미치(水野弘道) 전 후생연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들었다.
류 대표는 “미즈노 이사는 ESG전문가로 유명한 인물”이라며 “미즈노 이사가 기금운용본부장으로서 체계를 잘 잡아놓은 덕분에 지금까지 일본 후생연기금은 세계 최고의 ESG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 택소노미, ESG 워싱 막을 방파제
ESG워싱은 분류체계, 즉 택소노미(Taxonomy) 구축을 통해서도 걸러낼 수 있다.
한국의 택소노미 중에선 특히 사회 분류체제 즉 소셜 택소노미(Social Taxonomy)가 취약하다. 올해 기획재정부가 사회적채권 가이드라인을, 산업통상자원부가 한국형 사회분류체계를 개발하겠다고 밝힌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녹색분류체제는 환경부, 금융감독원 등 여러 부문의 협조 속에 가동을 시작했다.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인 'K-택소노미'는 4월 발표됐다. 시범사업을 통해 11월까지 6400억 원 규모의 녹색채권이 발행됐다.
20일엔 금융감독원이 금융사들과 K-택소노미 적용시스템(KTSS)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사실 사회분류체계는 녹색분류체계보다 도입이 어렵다. 기후나 환경 부문은 분류 틀을 과학적 지식 즉 증명 가능한 정보에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기가 쉽다.
그러나 사회 부문은 좀 더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일자리, 생활 수준 같은 목표를 정의하고 실행가능한 해법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인 가치관, 정치적 진영 논리가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류 대표는 소셜 택소노미 중에서도 'DEI' 측면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DEI는 '다양성과 형평, 포용(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의 줄임말이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P&G, 디즈니, 넷플릭스 등 글로벌 대기업들은 DEI를 지속가능보고 항목에 넣고 있다.
일부 DEI 지표들은 기업의 재무성과에 높은 영향을 준다. 류 대표는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사례로 들었다. 이 펀드의 수익률은 코스피지수와 유사하다. 적어도 나쁘지는 않다.
특히 B2C 즉 소매기업의 재무성과는 여성 임원 비율과 상관관계가 높다. 류 대표는 "한국에서 소비선택권의 80%는 여성에 있다"며 "B2C 기업엔 여성 임직원이 많아야 트렌드를 읽는 데에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인력 풀 측면에서도 다양성이 필요하다. "인재를 인구의 절반에서만 구하는 기업과 전체에서 구하는 기업 중 어느 쪽이 인재 확보에 유리하겠는가"라고 류 대표는 반문했다.
직장에서 소수성을 존중하고 의사소통이 수평적인 기업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류 대표는 "중장기적으로 DEI를 감안하는 기업들이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며 "5년 정도 봤을 때 서스틴베스트 평가등급으로 상위 AA, A 등급 기업의 주가는 코스피지수를 1.5~2.0% 정도 아웃퍼폼(시장 수익률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사회 전반적으로 ESG를 향한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ESG워싱의 감시 수준도 높아질 것으로 바라본다. 특히 기관투자자의 운용역들이 기후변화나 환경 관련 인식이 높은 MZ세대로 교체되고 있는 현상을 놓고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류 대표가 서스틴베스트 사무실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하는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 ESG펀드들의 워싱 막으려면 한국판 SFDR 필요
유럽의 지속가능금융정보공개규제(SFDR)와 같은 규제를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류 대표는 "현재는 한국에 ESG 펀드가 많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이 워싱 의심을 받고 있다"며 "한국판 SFDR를 만들어 워싱을 최소화하고 투자자들이 제대로 요구해야 기업들도 반응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아울러 ESG평가기관들도 ESG워싱을 판별하려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는 “기업이 공시하는 ESG성과가 우수해도 ESG와 관련된 사회적 논란거리(controversy)가 발생하는지를 더욱 자세하고 예민하게 모니터링하고 관련 논란에 휘말린 기업들의 평가를 낮추게(down grading) 될 것”이라며 “빅데이터 분석과 정보 소스의 다양화를 통해 기업의 홍보성 ESG정보에 대한 스크리닝도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관투자자의 운용역들이 기후변화나 환경 관련 인식이 높은 MZ세대로 교체되고 있는 현상은 고무적인 요소로 꼽혔다.
류 대표는 “고객사 중엔 서스틴베스트 직원들보다 환경에 관심과 지식이 높은 펀드매니저가 있다”며 “환경 관련 직책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렇고 나이를 물어보면 대개 30대 중후반 MZ세대"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한국이 ESG워싱에 제대로 대응하고 세계의 ESG 흐름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민간 ESG 평가시장이 발전해 한국 사정에 맞춘 기준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류 대표는 “ESG 투자와 경영은 결국 평가에서부터 출발한다”며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민간에서 독립된 평가사들이 혁신과 열정을 쏟아 부어 새로운 평가모델과 투자 전략들을 개발하고 그것이 시장을 통해 적정한 가격으로 회수할 수 있는 시장 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ESG 가운데 특히 S와 G는 나라별 지역별 특수성과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며 “하지만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여전히 MSCI 등 글로벌 민간 ESG 평가기관들의 기준이 한국적 상황에도 적실성이 있고 아울러 권위를 갖는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민간 ESG 평가사들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다면 한국과는 여러 조건이 다른 외국의 기준에 맞춰진 ESG 기준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류 대표는 “MSCI 등 해외의 민간 ESG 평가기관은 앞으로 자본력, 브랜드 파워 등을 활용해 호시탐탐 한국시장 진입을 확대할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한국 ESG 시장은 외국 평가기관을 놀이터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되면 한국의 ESG는 우리의 기업문화, 경제 및 산업구조, 경제 발전단계, 규제 체계 등이 상이한 서구적 평가잣대에 부자연스럽게 꿰어 맞춰지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자본운용가가 생각 바꿔야 자본주의 바꾼다"
2018년 한때 그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최종 후보에도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의결권 행사 지침)를 누구보다 잘 이끌 적임자로 꼽혔다. 고(故)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에게 꿈을 물었다. 그는 "내가 죽어도 서스틴베스트가 커나가는 것, 그래서 서바이벌리티(생존성) 중심의 자본시장을 서스테이너빌러티(지속가능성)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선 자본운용가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경숙 이상호 기자
[편집자주] “최근 높아진 ESG 압박의 90%는 기후에 관한 것이다.” 한 ESG 전문가가 말했다. 전 세계 회계기준을 만드는 국제회계기준 재단은 기후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TCFD) 공시 기준에 기반한 ESG 공시 기준을 2023년 공표한다. ‘기후패권’을 장악한 유럽연합은 'EU택소노미, 공급망 실사 지침, 탄소국경세’ 3종 세트로 전 세계 기업들로부터 탄소중립 전략을 이끌어내고 있다. 2023년 이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 비즈니스포스트는 분야별 ESG 전문가들을 만나 총 4회에 거쳐 ESG공시와 평가, EU택소노미, 공급망 실사지침 등 ESG 핫이슈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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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SG 핵심은 이것] (3) EU택소노미가 밀려온다
[2023 ESG 핵심은 이것] (4) 법제도화되는 ESG, 핵심은 '준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