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TSMC가 미국 공장에 도입하는 반도체 파운드리 공정을 대만 공장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으로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TSMC 반도체 파운드리공장. |
[비즈니스포스트] 대만 TSMC가 미국 반도체 파운드리공장에 공격적 투자 확대를 예고했지만 최신 공정기술 기반의 반도체는 계속 대만 내 공장에서 생산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핵심 반도체기술과 인재 유출을 우려한 대만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결정으로 분석되는 만큼 TSMC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삼성전자에도 딜레마를 안기고 있다.
8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국언론 보도에 따르면 TSMC는 미국 애리조나 반도체공장에서 대만 공장보다 한 단계 낮은 미세공정 기술을 활용하는 ‘N-1’ 전략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TSMC는 이르면 2024년 가동을 시작하는 애리조나공장에 4나노(N4) 또는 5나노(N5) 미세공정을 도입하고 이후 추가로 증설하는 생산라인에 3나노(N3) 공정기술을 적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기존에 120억 달러로 계획하고 있던 투자 규모를 400억 달러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TSMC가 미국 공장에 해당 공정을 도입하는 시기는 모두 대만 공장보다 한걸음 늦다.
TSMC는 올해 말부터 대만에서 3나노 미세공정 반도체를 생산하며 2025년부터는 2나노 반도체를 상용화해 양산에 들어간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벌인 뒤에도 최신 기술은 모두 대만에 남겨두기로 한 셈이다.
미국 정부는 TSMC가 현지에 첨단 반도체 생산기술을 도입해 미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을 높이고 중국과 관련한 지정학적 리스크도 해소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TSMC가 최신 공정 기반의 반도체를 계속 대만에서 생산하기로 결정한 것은 기술 및 핵심 인력의 유출 가능성을 우려한 대만 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에 따르면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장관은 TSMC가 미국에 투자를 확대하더라도 대만이 반도체 생산에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TSMC가 이미 대만에 차세대 2나노 및 1나노급 미세공정 반도체 연구개발센터와 생산시설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됐다.
대만 과학기술부 장관은 대만 정부가 이미 TSMC의 미국 공장에서 핵심기술 유출을 방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인력을 파견하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고 말했다.
TSMC의 미국 투자 확대가 대만의 반도체 국가 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그만큼 면밀히 살펴보며 정부 차원에서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TSMC가 새 반도체 공정기술을 도입하고 생산을 안정화하는 데 들이는 비용이 미국에서는 훨씬 커질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도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 삼성전자 텍사스주 오스틴 반도체 파운드리공장 내부. |
TSMC가 이처럼 미국 공장에 한 세대 낮은 기술을 도입하는 전략을 유지하기로 한 점은 최대 경쟁사인 삼성전자에 기회이자 위기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를 들여 건설하고 있는 반도체 파운드리공장에 어떤 공정을 도입할 지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선단 공정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확정됐다.
만약 삼성전자가 곧바로 3나노 반도체 생산라인을 도입한다면 TSMC보다 먼저 최신 기술을 위탁생산에 활용하게 될 수도 있다.
퀄컴과 AMD, 엔비디아 등 미국 내 주요 반도체 파운드리 고객사들은 미국 정부 방침에 따라 미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를 적극적으로 주문해 활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TSMC보다 앞선 미세공정 반도체를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다면 TSMC와 고객사 수주 경쟁을 벌이는 데 상당히 유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삼성전자가 앞으로 3나노에 이어 2나노와 1.4나노 등 차세대 공정을 계속 미국 반도체공장에 선제적으로 적용해 TSMC에 경쟁 우위를 유지하는 전략을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꼽힌다.
삼성전자와 한국 정부도 대만 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일은 기술 유출 가능성 등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TSMC와 기술 격차를 지켜내 고객사 수주에 우위를 차지할 지, 아니면 한국을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유지할 지를 두고 딜레마에 놓이게 됐다.
삼성전자는 현재 세계 파운드리시장에서 TSMC에 점유율을 크게 밀리고 있다.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미국 주요 고객사와 관계를 강화하려면 미국에 더 적극적으로 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일이 효과적일 수 있다.
더구나 TSMC가 미국 반도체공장 투자 규모를 대폭 늘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더 공격적인 전략으로 대응에 나서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미국 공장에 첨단 반도체기술을 적용하는 일은 TSMC와 마찬가지로 비용 부담이나 다양한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단점도 뚜렷한 선택지에 해당한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 시행에 따른 보조금 지급이나 삼성전자의 중국 반도체사업 규제 등을 무기로 삼아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기업의 첨단 공정 투자를 압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