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제임스 본드와 징크스(본드걸)가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치고 있다. 이 장면을 물소를 몰고가던 두 명의 한국 농부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2002년 개봉한 스파이 액션 영화, ‘007 어나더데이’에서 묘사된 한국의 모습이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수리남을 둘러싸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다. 14개 나라에서 시청시간 1위를 기록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수리남' 포스터.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고 탐욕스럽게 헬리콥터를 바라보는, 소도 아닌 물소를 몰고 가고 있는 한국 농부들을 마주한 국내 관객들은 분노했다.
여기에 당시 화해분위기였던 남북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스토리, 남녀 주인공이 절에서 정사를 나누는 장면에 격분한 조계종까지 합세했으니 한국에서 007 어나더데이 불매운동이 일어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4억2천만 달러의 수익을 낸 007 어나더데이는 국내에서는 단 6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며 한국에서는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인 ‘수리남’을 둘러싸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리남 외교부 장관이 “우리는 더 이상 마약 운송 국가가 아니며,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번 드라마 때문에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며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항의의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흥행에 성공한 콘텐츠는 일반 대중의 정서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한 지역의 이미지가 그대로 대중에게 각인돼 버리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지역의 정부, 지역민들로서는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수리남과는 달리, 대부분의 논란은 영화의 내용이 완전한 창작일 때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공포영화 ‘호스텔’이다.
호스텔은 유럽을 여행하던 미국의 대학생들이 슬로바키아에서 의문의 조직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일을 겪는 내용을 담은 슬래셔 영화(잔혹한 내용의 공포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동유럽, 특히 슬로바키아의 치안과 관련된 불신이 팽배해졌고 결국 슬로바키아 정부는 제작사에 공식적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항의는 없었지만 한 국가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로 써버린 영화도 있다. “나는 너희를 찾을 것이다. 찾아내서 죽일 것이다“라는 리암 니슨의 명대사로 유명한 피에르 모렐 감독의 느와르 영화 '테이큰'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브라이언 밀스의 딸 킴벌리 밀스를 납치한 조직은 알바니아계 마피아다. 분노한 브라이언 밀스가 마피아들을 몰살시키고 딸을 구해내는 데 성공하면서 관객들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영화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알바니아에게는 ‘마피아들의 나라’라는 선입견이 씌워졌고 그 이미지는 아직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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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호스텔(왼쪽)과 피에르 모렐 감독의 테이큰. 두 영화는 각각 슬로바키아와 알바니아의 국가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줬다.
현실을 배경으로 한 호스텔과는 달리 완전히 판타지 창작물임에도 불구하고 항의를 받은 사례도 있다. 바로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2006년작 판타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잭 스패로우 선장은 '펠레고스토'라는 이름의 가상의 섬에서 한 부족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다. 이를 두고 촬영지인 카리브해의 원주민 부족인 가라푸나 족은 “영화가 우리 섬의 원주민들을 인육을 먹고싶어하는 야만인들로 묘사하고 있다”며 “매우 부정확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한 것이며 할리우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겠다”고 반발했다.
우리나라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정범식 감독이 제작한 공포영화 ‘곤지암’은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곤지암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공포영화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경기도 광주시는 영화 제목을 변경해달라는 공문을 제작사에 보냈지만 거절당했고, 영화 곤지암은 전국적으로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실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화인 것처럼 묘사하다가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산 영화도 있다. 2007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극락도 살인사건’이다.
이 영화는 ‘극락도’라는 가상의 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영화의 예고편에 ‘신안군 자은면’이라는 자막을 넣고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처럼 영화를 홍보하다가 신안군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실제로 이 영화가 신안군 자은면 두리도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신안군이 공식적으로 제작사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주민들과 신안군 공무원 노조 등이 제작사를 항의 방문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반대로 영화의 흥행을 지역의 홍보에 이용하는 사례도 있다. 나홍진 감독의 2016년 개봉 영화 ‘곡성’과 이창동 감독의 2007년 개봉 영화 ‘밀양’이다.
▲ 한글로만 쓰여있는 곡성의 포스터(왼쪽)과 한자가 병기돼있는 포스터.
영화 곡성의 개봉 당시 유근기 곡성군수는 곡성군에 대한 이미지에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며 제작사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는 곡성군의 항의를 받아들여 영화 포스터에 ‘곡성(哭聲)’이라는 한자를 병기하기로 결정했다. 유 군수는 전남일보 인터넷판에 ‘곡성(哭聲)과 곡성(谷城)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우리 곡성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적기도 했다.
밀양군 역시 영화 밀양의 개봉 당시에는 밀양의 이미지 실추와 관련된 우려를 표시했지만, 주연 배우 전도연씨가 한국배우 최초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영화 촬영지를 관광지화 하는 등 영화를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