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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이상운 효성 부회장

성실함의 대명사, 선이 굵은 영업
장윤경 기자 strangebride@businesspost.co.kr 2016-05-19 09:4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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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이상운 효성 부회장
▲ 이상운 효성 부회장.


이상운은 1952년 3월18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를 나와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지점장, 호주 시드니지점장을 거치며 국제 섬유업계 동향을 익혔다. 효성물산 기획실과 시장개척실, 사업개발실 등에서 업무 경험을 쌓았다.

비서실장 전무로 자리를 옮겨 조양래 효성그룹 회장을 보좌하며 요직을 맡았다.

그룹 전략본부장도 맡아 구조조정을 총괄했다. 효성 최고운영책임자로 발탁된 뒤 효성 대표이사 사장과 효성그룹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조 회장의 최측근이자 그룹의 2인자로 꼽힌다. 조 회장의 공백으로 어려움에 처한 효성을 이끌어 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한 우물을 판 CEO로 평가받는다. 또 2016년 5월 기준으로 15년 째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있어 장수 전문경영인으로 불린다.

'레터경영'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레터경영'은 이상운이 임직원들에게 CEO레터를 보내 그가 일상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독서를 통한 깨달음, 국내외 경영혁신 사례 등을 효성의 경영상황에 맞게 풀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CEO레터는 여러 나라 언어로 변역돼 전 세계의 임직원들에게 전달되며 2004년 9월부터 매월 보내 100회를 넘겼다.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일은 많지만 매달 쉬지 않고 10년 이상을 이어온 경우는 드물다.

100번째 레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비결은 철저히 사전에 준비하는 책임정신으로 가능했다"면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준비와 책임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가장 큰 공로로 인정받는 것이 섬유회사에 불과했던 효성을 산업용 소재와 장치를 제조하는 기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 핵심사업을 키워냈다. 2002년 효성 사장에 취임한 뒤 대규모 M&A도 성사시켜 규모의 경제를 키웠다는 의견도 있다.

‘섬유 수출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효성물산에 근무하면서 국제 섬유업계 동향을 습득했다. 젊은 시절 커다란 이민가방에 샘플들을 넣고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선이 굵은 영업을 펼쳤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으로 했다. 이상운은 현지 시장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성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또 일처리에 빈틈이 없고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항상 아침 7시 반 이전에 출근했다고 한다.

2015년 들어 효성 실적은 크게 개선되고 있다. 효성은 2015년 연결기준 매출 12조4584억 원, 영업이익 9502억 원을 냈다. 이는 2014년보다 매출은 2.31%, 영업이익은 58.27% 늘어난 수준으로 창사 이래 최대실적이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6년 유학준비를 하다가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1979년 유학을 가기로 다시 결정하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회사는 이상운을 붙잡기 위해 호주 시드니의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고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여 4년 동안 주재원 생활을 했다.

1983년 귀국 후 효성물산 직물수출 과장을 맡아 연간 3천만 달러의 수출규모를 1억 달러로 늘렸다.

1988년 밀라노 1인 지점장으로 갔을 때는 1년에 3천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1991년에 귀국해 봉제무역부장을 거친 뒤 1993년에는 영업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기획부장이 됐다.

1990년 4월 효성물산 부장, 1994년 2월 이사대우, 1995년 2월 이사에 차례로 올랐다. 1998년에는 효성물산 기획관리실장 겸 사업개발실장 상무이사가 됐다.

1998년 11월 효성T&C와 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이 효성으로 합병되면서 효성 재무본부 상무이사를 맡았다.

1999년 1월 효성 비서실의 회장비서(상무이사)에 올랐고 같은 해 9월 효성 비서실장 전무이사로 승진했다.

2001년 2월에는 효성 전략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2년 2월 효성 대표이사 사장 겸 효성그룹 COO겸 전략본부장으로 선임됐다.

2014년부터 2016년 3월까지 효성그룹 계열 광학필름 업체인 신화인터텍 대표이사를 겸직했다.

2015년 3월부터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를 지원하기 위해 전사 차원의 역량을 모은 효성의 창조경제지원단장을 맡고있다.

2015년 7월 FMK(포르자모터스코리아)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FMK는 페라리와 마세라티 수입사다.

2015년 12월 몽골정부와 1420억 원 규모의 220KV급 변전소 2기와 송전망 및 송전탑을 건설하는 내용의 MOU를 체결하는데 공헌했다.

2016년 4월 더클래스효성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더클래스효성은 효성그룹 계열 메르세데스 벤츠 공식딜러사다.

◆ 학력

1969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힐아버지는 이종우 전 고려대 총장이다.

아버지는 이동수 전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이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박화서씨다.

형은 이상완 삼성전자 고문이다.

◆ 상훈

2011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3년 인촌기념회 인촌상 산업기술부문을 받았다.

◆ 상훈

2011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3년 인촌기념회 인촌상 산업기술부문을 받았다.

어록


“위기에 강한 기업이 되겠다.” “지난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둔화와 유가 급락, 환율 변동성 확대 등으로 인해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했다.” “국내경기도 세계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해 수출이 감소하고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사 경기침체 등으로 내수 또한 부진한 힘겨운 한 해를 보내야 했다.” (2016/03/18, 효성 주주총회에서)

“세계 1위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의 글로벌 생산량 확대와 판매 활성화를 이뤄 매출과 이익 모두를 성장시켰다. 화학 분야에서도 프로필렌 공장을 우리 독자기술로 증설했고 실적이 부진했던 산업용 특수가스 NF3의 공정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수익을 개선했다.” (2016/03/18, 효성 주주총회에서)

“효성은 글로벌 시장에서 토탈 전력 및 솔루션 공급자로서 그 동안 인도, 중동 등 전력 환경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건립 및 운영 역량을 확보하는 등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왔다.” “이번 MOU체결로 몽골 전력 시장의 주요 공급자로 자리매김할 뿐만 아니라, 몽골을 넘어 중앙ㆍ동남 아시아 전력시장의 신흥강자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 (2015/12/17, 효성이 몽골정부와 변전소와 송전탑을 건설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임직원 모두는 지금부터라도 철저한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시장 상황과 경쟁자를 면밀히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해 경쟁에서 이기는 조건을 하나하나 갖춰 나가야 한다.” (2014/12/06,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현재 재판 중인 사항이라 답변하기 곤란하다.” (2014/10/16 ,국회 정무위원회의 금융감독원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정우택 정무위원장의 위증 지적을 받은 뒤에)

“숨긴 게 아니라 페이퍼컴퍼니 CTI, LF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갖고 있었던 것. 또 조 회장의 개인 자산으로 만들기 위한 게 아니었고 효성을 위한 것이었다.” (2014/10/16, 국정감사에서 ‘2011년 800억 원에 이르는 카프로 주식을 매각하면서 537억 원의 양도차익이 생겼는데 이걸 왜 숨겼냐’는 질문에 답하며)

“효성의 사업은 이미 세계화 됐고, 사업구조 또한 복잡하고 다양해졌지만 임직원들의 의식과 역량 수준은 아직까지 이러한 변화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에 맞지 않은 규정이 있으면 바꾸고 적법한 지를 따져 일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2014/01, 신년사에서)

"제가 영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어요." (2004/08,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의욕이 생겼다. 은행을 방문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은행을 나오는 것으로 하루 해가 졌다.“ (2004/08,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제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업에 남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함께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 (2004/08,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 평가

한 우물을 판 CEO로 평가받는다. 또 2016년 5월 기준으로 15년 째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있어 장수 전문경영인으로 불린다.

'레터경영'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레터경영'은 이상운이 임직원들에게 CEO레터를 보내 그가 일상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독서를 통한 깨달음, 국내외 경영혁신 사례 등을 효성의 경영상황에 맞게 풀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CEO레터는 여러 나라 언어로 변역돼 전 세계의 임직원들에게 전달되며 2004년 9월부터 매월 보내 100회를 넘겼다.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일은 많지만 매달 쉬지 않고 10년 이상을 이어온 경우는 드물다.

100번째 레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비결은 철저히 사전에 준비하는 책임정신으로 가능했다"면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준비와 책임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가장 큰 공로로 인정받는 것이 섬유회사에 불과했던 효성을 산업용 소재와 장치를 제조하는 기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 핵심사업을 키워냈다. 2002년 효성 사장에 취임한 뒤 대규모 M&A도 성사시켜 규모의 경제를 키웠다는 의견도 있다.

‘섬유 수출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효성물산에 근무하면서 국제 섬유업계 동향을 습득했다. 젊은 시절 커다란 이민가방에 샘플들을 넣고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선이 굵은 영업을 펼쳤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으로 했다. 이상운은 현지 시장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성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또 일처리에 빈틈이 없고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항상 아침 7시 반 이전에 출근했다고 한다.

2015년 들어 효성 실적은 크게 개선되고 있다. 효성은 2015년 연결기준 매출 12조4584억 원, 영업이익 9502억 원을 냈다. 이는 2014년보다 매출은 2.31%, 영업이익은 58.27% 늘어난 수준으로 창사 이래 최대실적이었다.

◆ 기타

현역 군복무를 마치고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유학을 떠나기 전에 사회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효성물산에 입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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