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나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할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중국 기업은 세계무대에서 다방면에 걸쳐 우리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기업이라도 이들을 이끄는 핵심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기업의 경쟁상대인 중국 기업을 이끄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경영전략과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다. <편집자주>
노녕의 중국기업인탐구-텐센트 마화텅
[1] 중국판 카카오의 시작
[2] QQ, 사업확장의 초석 닦다
[3] 종합 투자회사로 발돋움
[4] 중국 반독점 규제에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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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마화텅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국민 메신저' QQ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카카오톡이 한국에서 갖추고 있는 시장 지위와 비슷하다.
텐센트의 마화텅은 중국 인터넷 태동기에 온라인 메신저플랫폼 QQ를 선보였고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자 중국에서 대부분의 인터넷 사용자가 QQ를 소통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 중국 채팅 플랫폼 QQ의 마스코트 캐릭터. |
QQ는 작고 통통한 펭귄 '샤오치어'를 메신저의 마스코트 캐릭터로 앞세웠다. QQ가 널리 보급될수록 샤오치어의 인기도 빠르게 상승했다.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 책가방, 옷 등 상품이 중국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불티나게 판매됐다.
한국의 카카오가 라이언 등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상품을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처럼 QQ는 이보다 더 먼저 메신저에 캐릭터를 활용해 사업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텐센트의 QQ는 이런 파급력 덕분에 중국에서 팩스와 핸드폰에 이은 새로운 통신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 소송전과 닷컴버블 사태로 위기 겪어
QQ의 초창기 명칭은 OICQ였다. 온라인 메신저의 원조 격인 이스라엘의 ICQ를 모방해 만들어졌다.
ICQ는 1996년 이스라엘에서 3명의 개발자들의 손에 만들어졌고 온라인상에서 친구를 호출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안착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ICQ와 같은 메신저는 '온라인 삐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세계 이용자들의 마음을 빼앗았고 채팅, 이메일, 파일 전송 등 기능도 구현할 수 있었다.
마화텅도 이런 온라인 메신저가 인터넷시장에서 큰 성장 잠재력을 갖춰낼 수 있다고 판단해 QQ를 출시하며 텐센트의 첫 사업으로 메신저를 점찍게 된 것이다.
텐센트의 QQ 성공은 중국 인터넷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쉬운 길이었던 건 아니다.
1999년 텐센트는 ICQ를 본따 만든 OICQ를 출시했다. OICQ는 중국에서 인터넷 사용자들에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어 단기간에 회원 수를 몇만 명 단위로 늘렸다.
사용자 수가 늘면서 서버도 계속 늘려나가야 했지만 당시 서버 위탁료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텐센트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다.
텐센트는 곧 소송에도 휘말렸다. ICQ는 마화텅이 만든 OICQ가 중국시장 회원들을 빼앗기 시작하자 텐센트를 지식재산권 위반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결국 텐센트는 소송에서 패소했고 OICQ라는 서비스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데다 배상금도 지급했다. QQ라는 지금의 이름은 소송전 뒤 바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전후 닷컴버블이 세계를 강타했다. 마화텅도 이 위기를 피할 재간이 없었고 결국 텐센트 사업 청산까지 생각하며 QQ 서비스를 외부에 매각하려 했다.
마화텅과 담당자들은 중화망이나 시나그룹 등 대기업에 100만 위안을 받고 QQ를 매각하려 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QQ의 매각가격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평가했고 심지어 그 가격이면 차라리 직접 메신저를 개발하는 것이 싸게 먹힐 것이라고 봤다.
QQ는 결국 매각에 실패했다. 텐센트는 결국 불어나던 비용을 감당하지 못 해 QQ 회원가입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재정위기 속에서도 QQ의 회원 수는 나날이 빠르게 늘어갔고 운영에 필요한 투자금도 확충하게 됐다. 마화텅이 QQ와 회원, 텐센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밤낮으로 국내외 투자자를 찾아다닌 덕분이다.
텐센트는 결국 중국 투자사 IDG캐피털과 홍콩 1위 통신기업 PCCW그룹의 투자를 받아 내는데 성공해 사업을 정상 궤도로 돌렸다
◆ QQ 이외 사업으로 텐센트 사업 확장
2004년 6월16일 텐센트는 홍콩증시에 상장했다. 현금흐름이 안정적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막강한 규모의 활성 회원을 보유하고 있어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QQ의 회원 수는 출시 2년도 안된 시점에 3천만 명을 넘겼다. 그리고 4년 만에 회원 1억 명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 채팅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당시 모든 나라의 온라인 서비스 업체를 통틀어 기적에 가까운 성장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화텅은 QQ 매각에 실패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훗날 동료들에도 “인터넷시장에서 눈 앞의 이익만 쫓아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망각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말해 왔다.
마화텅은 텐센트를 상장시킨 시점에서 하루 평균 활성 회원 수가 39만 명씩 늘자 더 이상 회원 수 확보에는 신경 쓰지 않고 QQ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마침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텐센트의 사업이 더 공격적으로 이뤄졌다면 규모는 지금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마화텅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텐센트의 사업 방식이 보수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화텅 역시 텐센트의 사업 확장을 추진할 지 여부에 고민과 부담도 컸다. 게다가 경영진 사이 합의도 완만하게 이뤄지기 어려웠다.
텐센트의 경영 시스템상 중대 사항은 임원진의 단체 의견을 모아 결정된다. 마화텅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른 임원진과 갈등을 겪었고 책상을 치며 문을 박차고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텐센트 내부적으로 어떤 사업을 새로 시작할 지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논쟁은 더 치열해 졌다. 그 사이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채팅 플랫폼 MSN이 중국시장에 들이닥쳤고 스카이프 등 플랫폼도 텐센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은 이미 이메일 기반 회원 수나 게임 이용자 수 등 연계 사업에서 많은 충성고객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QQ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마화텅은 결국 텐센트가 나아갈 길이 게임사업에 있다고 판단해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을 밀어붙였다.
텐센트는 넷이즈와 YOM에서 콘텐츠총괄을 맡았던 쑨중화이(孙忠怀)를 영입해 QQ게임이라는 전문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QQ 전용 홈페이지도 출시했다.
그리고 1년 만인 2004년에 QQ게임의 동시접속자 수가 100만 명이 넘는 대성공을 거뒀다. 2005년 QQ의 홈페이지 회원 수는 중국 내 최다를 기록했다.
알리바바와 바이두 등을 대표로 한 전자상거래업체, 검색엔진업체들이 중국 인터넷시장에서 급성장하자 텐센트도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했다.
결국 텐센트는 스타트업의 성격을 띠던 창업 초창기에서 인터넷시장 성장에 대응하는 안정기에 진입하게 됐다. [비즈니스포스트 노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