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기판 투자는 삼성전기의 투자여력뿐만 아니라 고객사들의 사업 본격화 계획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29일 전자부품업계에서는 경 사장이 삼성전기의 재무건전성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삼성전기의 2021년도 3분기 잠정실적을 분석해보면 순차입금(차입금에서 보유현금을 뺀 수치)이 마이너스(–) 654억 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보다 5897억 원 줄었다.
차입금보다 보유현금이 더 많은 순현금의 플러스 상태에 삼성전기가 들어선 것은 분기 기준으로 이번이 처음이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현금 창출능력을 앞세워 재무건전성을 당분간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동주 SK증권 연구원은 “전방산업인 IT기기 완제품시장의 공급망 차질에 따른 우려 속에서도 삼성전기는 저수익 사업을 정리하면서 눈에 띄게 좋은 실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며 “과거 전자부품업황이 좋았을 때와 비교해도 현재 사업구조에서 나오는 이익체력이 더욱 탄탄하다”고 봤다.
기업의 탄탄한 재무구조는 그만큼 투자여력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전자부품업계에서는 삼성전기가 조만간 대규모 투자에 나설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선이 늘고 있다.
특히 10월 초부터 삼성전기가 반도체기판의 일종인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기판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데 1조 원을 투자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 기판은 PC용 중앙처리장치(CPU) 등 높은 성능을 요구하는 반도체에 쓰이는 고부가 기판이다.
삼성전기는 투자 가능성과 관련해 발언을 자제해 왔으나 최근에는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여러 고객사들의 투자 요청이 있었다”며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의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계현 사장에게 삼성전기의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 대규모 투자는 던져볼 만한 승부수로 여겨진다.
삼성전기에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 투자를 요청한 고객사들 가운데 미국 AMD가 가장 적극적이라는 것이 전자부품업계의 주된 시선이다.
AMD는 PC용 중앙처리장치시장에서 인텔의 점유율을 점차 잠식하면서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최근에는 서버용 중앙처리장치시장에도 진출해 인텔과 경쟁구도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기판 조달이다.
서버용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은 일본 이비덴과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 기술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회사들만이 생산할 수 있다. 삼성전기는 아직 이 시장에 진입하지 않았다.
AMD로서는 서버용 중앙처리장치시장에서 인텔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서버용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의 핵심 조달처로 인텔의 부품 조달망에 포함되지 않은 새 제조사를 물색할 가능성이 높다.
이비덴과 유니마이크론은 모두 인텔에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을 공급하고 있는 만큼 삼성전기의 시장 진입은 AMD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시장에 진출하는 큰 계기가 될 수 있다.
경 사장도 서버용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사업을 삼성전기 반도체기판사업의 새 성장동력으로 눈여겨보고 있다.
이에 앞서 삼성전기는 27일 진행한 2021년 3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현재 다수의 고객사들과 협업해 서버용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에 요구되는 대면적 기판기술과 기판 다층화기술 등 핵심기술을 지속 개발하고 있다”며 “빠르면 2022년 하반기 서버용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기와 AMD는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 투자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는 경 사장의 투자결정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다만 경 사장은 기판 투자와 관련해 아직은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도 하다.
▲ 삼성전기의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기판. <삼성전기>
고객사에 적기에 기판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고객사의 사업 본격화 의사결정보다 먼저 투자를 마쳐 놓아야 한다.
그런데 AMD의 서버용 중앙처리장치시장 진출에는 기판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글로벌 반도체시장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산능력 부족문제도 함께 해결돼야 한다.
경 사장은 설비투자뿐만 아니라 투자를 마친 뒤 설비의 가동을 관리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이는 성향을 보여 왔다. 재무적 관점에서다.
예를 들어 삼성전기는 지난해 말 중국 톈진에 전장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생산공장을 기계적으로 완공했다. 그러나 본격적 양산 가동은 올해 9월에야 시작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공장의 상업가동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설비의 감가상각도 함께 시작된다”며 “최적의 가동시점을 찾기 위해 단순히 시장상황뿐만 아니라 재무상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도 함께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세심함을 고려하면 경 사장은 삼성전기의 반도체기판 대규모 투자와 관련해서도 설비 완공시점과 고객사의 기판 수요 발생시점을 면밀하게 따지면서 의사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전자부품업계 관계자는 “삼성전기는 당분간 재무구조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하면서 글로벌 파운드리 공급부족 관련 현안을 예의주시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파운드리 공급능력 부족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일 때 반도체기판 투자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