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오일메이저들이 신재생에너지 관련 투자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석유 및 가스자산의 매각까지 추진하는 회사도 있다.
오일메이저는 네덜란드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 쉘),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BP), 프랑스 토탈(Total), 이탈리아 에니(ENI) 등 유럽의 4개 석유회사와 엑슨모빌(ExxonMobil), 셰브론(Chevron), 코노코필립스(Conoco Philips) 등 미국의 3개 석유회사를 묶어 이르는 말이다.
▲ 그린인베스트먼트그룹(GIG)이 투자한 일본의 해상 풍력발전단지.
오일메이저들은 지금까지 석유를 통해 글로벌시장에 군림해 왔는데 이들의 신재생에너지 드라이브를 놓고 석유의 시대가 저무는 전조라는 해석이 힘을 받는다.
4일 국내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이 한국 그린뉴딜정책에서 사업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토탈은 글로벌 신재생에너지 개발 및 투자회사인 그린인베스트먼트그룹과 손잡고 한국에 해상 풍력발전단지 구축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울산에 1.5GW, 전남에 800MW 등 모두 2.3GW 규모의 부유식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구축하는 것으로 2023년부터 공사가 시작된다.
그린인베스트먼트그룹은 신재생에너지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해상 풍력발전단지를 부유식으로 짓는 것은 첫 시도다. 토탈은 신재생에너지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국내에서도 현대중공업과 세진중공업 등 부유체 제작회사와 씨에스윈드, 삼강엠엔티 등 풍력타워 및 하부구조물 제작사, 두산중공업 등 터빈 제조사들도 합종연횡하며 사업 참여를 준비하고 있다.
오일메이저의 신재생에너지 투자는 토탈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이에 앞서 9월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은 장기적으로 석유 관련 자산을 250억 달러(29조 원가량)어치 매각하고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10배 늘리는 대규모의 투자전략 전환계획을 내놨다. 이를 통해 2025년 20GW, 2030년 50GW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포트폴리오를 확보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에니는 덴마크 에너지회사 폴크(Falck)와 49:51로 합작해 미국에 만든 신재생에너지 투자회사 노비스(Novis)를 통해 8월 미국의 풍력 및 태양광회사인 빌딩에너지를 3250만 달러(382억 원가량)에 인수했다. 빌딩에너지를 통해 미국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프로젝트를 선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해 쉘은 프랑스 에올피(Eolfi)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프랑스 1위의 부유식 해상 풍력발전회사로 글로벌에서 200개 이상의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쉘은 에올피를 인수하면서 신재생에너지 관련 투자를 기존의 연 20억 달러(2조3천억 원가량)에서 연 30억 달러(3조5천억 원가량)로 확대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들 유럽계 오일메이저 4곳이 신재생에너지 관련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과 달리 엑슨모빌, 셰브론, 코노코필립스 등 미국계 3곳은 신재생에너지 관련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계 오일메이저와 유럽계 오일메이저는 석유사업의 미래와 관련해 다른 시각을 보유하고 있다”며 “특히 석유사업을 바라보는 엑슨모빌과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의 관점이 가장 상반돼 있다”고 말했다.
엑슨모빌은 2019년도 에너지전망 보고서를 통해 신재생에너지가 석유를 완전히 대체하는 미래를 75년 뒤라고 예상했었다. 국제에너지기구(EIA)가 바라보는 35년 뒤보다 훨씬 멀다.
반면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은 앞서 9월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석유 수요가 지난해 이미 정점이었거나, 길어도 2035년을 기점으로 감소세에 들어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냈다.
현재로서는 엑슨모빌이 대표하는 미국계 오일메이저의 시각보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이 대변하는 유럽계의 시각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엑슨모빌의 전망과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의 전망 사이 코로나19라는 초대형 변수가 글로벌 에너지시장을 휩쓸었다. 그리고 글로벌 선진국들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그린뉴딜을 선택하면서 신재생에너지 확대가 뉴노멀(New Normal)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석유 수요가 지난해를 정점으로 줄어든다는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엑슨모빌의 예상처럼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석유는 연료로서의 수요 외에도 원유 정제과정에서 가장 먼저 생산되는 나프타가 화학제품의 주요 원재료로 쓰인다는 수요가 있다.
그러나 석유는 화학제품 원료로서의 수요도 셰일가스에 빠르게 침식당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주요 화학제품 수출국인 미국에서는 나프타 분해설비(NCC)가 아닌 에탄 분해설비(ECC)가 화학사업의 주류다.
▲ 사솔(Sasol)이 미국에 보유한 에탄 분해설비(ECC).
이에 앞서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화학회사 사솔(Sasol)이 미국에 보유한 에탄 분해설비 프로젝트가 인수합병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영국 이네오스(Ineos)와 네덜란드 라이온델바젤(LyonDelBasell), LG화학, 한화솔루션 등 글로벌 화학회사뿐만 아니라 엑슨모빌, 셰브론, 코노코필립스 등 미국계 오일메이저들도 모두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결국 셰브론과 코노코필립스의 컨소시엄이 사솔 에탄 분해설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8월 선정됐다.
이 인수전은 신재생에너지를 바라보는 관점과 별개로 미국계 오일메이저들도 고전적 석유사업의 한계를 느끼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사례라고 에너지업계는 바라본다.
8월에는 셰브론필립스 컨소시엄의 사솔 인수전 승리 말고도 석유사업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상징적 사건이 2가지 있었다.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는 글로벌 시가총액 1위의 자리를 미국 애플에 내줬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시가총액 1위 회사였던 엑슨모빌이 미국 다우30지수에서 퇴출되기도 했다.
이런 사건으로 코로나19가 석유시대 종말의 서막을 연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에너지업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창립을 주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 전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장관의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돌이 없어서가 아니 듯 석유의 시대도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