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동남아시아에서 진격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속도전으로 동남아시아 자동차시장에 철옹성을 구축한 일본 브랜드 사이를 파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 동남아시아 공략에 잰걸음
5일 현대차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공략을 위한 투자계획에 점차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는 5월에 싱가포르 서부 주롱산업단지에서 오픈 이노베이션랩인 ‘현대모빌리티 글로벌 혁신센터(HMGICs)’의 착공에 들어간다.
연구개발과 비즈니스, 제조 등 미래 모빌리티의 밸류체인(가치사슬) 전반을 혁신할 새로운 사업과 기술을 개발하고 검증하기 위한 투자다.
현대차는 2022년 하반기에 연구개발센터를 완공해 앞으로 세계 최고의 개방형 혁신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대차가 싱가포르에 이런 연구개발센터를 만드는 것을 두고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현대차는 이미 혁신적 아이디어를 보유한 회사를 발굴하고 이를 비즈니스와 연계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개방형 혁신센터인 ‘현대크래들’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베를린, 중국 베이징, 한국 등 미래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다양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모여드는 주요 도시에 거점도 있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싱가포르에 혁신사업의 연구개발센터를 만드는 것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의 모빌리티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주목해 전략적 투자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의 자동차 판매량은 2017년 약 316만 대 수준에서 2026년에는 449만 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대부분 안정적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신흥국가인데다가 평균 연령이 30대 안팎인 국가들로 구성돼 있어 자동차 소비층이 계속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 자동차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와 같은 신흥시장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동차 전문 컨설팅기업인 알릭스파트너스는 현재 세계 자동차시장의 성장률에서 9%가량을 차지하는 동남아시아시장의 비중이 2026년에는 35%까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현대차의 동남아시아 생산거점으로 인도네시아를 점찍고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동남아시아시장 전체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2019년 11월 인도네시아에 연간 생산량 25만 대 규모의 완성차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일부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2021년 말부터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하겠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동남아시아 최대 차량 호출서비스기업인 그랩에도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서는 실제로 코나EV 200대를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 일본 브랜드의 아성 조금씩 깨뜨려
현대차가 그동안 동남아시아 진출을 망설여왔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본 브랜드 때문이다.
일본 토요타는 동남아시아에서 50%에 이르는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혼다와 미쓰비시, 닛산 등 다른 브랜드까지 합하면 점유율이 80~90% 수준까지 올라간다.
일본 완성차기업들이 196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사업기반을 다진 덕분이다.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도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해보려 했지만 일본 브랜드들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수석부회장이 동남아시아 진출을 선언한 것은 자동차시장의 규모와 성장세를 고려할 때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말 인도네시아 정부와 인도네시아 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협약을 맺은 것 자체가 정 수석부회장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현대차는 전했다.
실제로 가능성이 조금씩 열리는 점은 현대차에게 긍정적 신호다.
현대차의 베트남 합작기업인 현대탄콩에 따르면 현대차는 2020년 1분기에 베트남에서 자동차를 모두 1만5362대 판매했다. 토요타의 판매량을 1600대 넘게 앞선 것이다.
현대차가 베트남에서 분기 판매 기준으로 토요타를 제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1년 베트남 현지기업인 탄콩그룹에 생산을 위탁하는 방식으로 베트남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지 약 9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브랜드를 제치는 성과를 낸 것이다.
10년 가까이 사업 기반을 다져온 덕분에 현대차가 일본을 넘어설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가격 대비 성능(가성비)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소비자들 사이에 번진 것도 현대차의 베트남 입지 확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앞으로도 당분간 입지 확대를 위해 소형차 위주의 가성비 전략을 계속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신흥국가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아직 중대형 고급 세단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현대차가 2021년 말부터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생산할 차종도 현재는 소형차로 계획돼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