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고 있지만 관련 절차가 올해 안에 끝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14일 정치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장관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의 비준을 위한 의견 수렴 과정에서부터 경영계와 노동계 양쪽의 반발에 직면해 있다.
이 장관은 한국이 아직 비준하지 않은 결사의 자유 관련 제87호·제98호와 강제노동 금지 관련 제29호·제105호 가운데 제105호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비준을 추진하고 있다.
제105호가 제외된 이유는 정치적 의견을 내놓거나 파업에 참가한 사람의 처벌에 따라오는 강제노동 금지를 담고 있어 이 협약을 비준하면 형벌체계 전반을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3개는 해직자 등의 노조 가입 허용, 단결권을 행사하는 노동자의 보호, 의무병역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비자발적 노동 금지를 담고 있어 노동 관련 법률을 개정하면 된다.
이 장관은 9월 정기국회에 핵심협약 3개의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면 연내에 의결되길 바라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노동 관련 법률의 개정도 올해 안에 마무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6월 국제노동기구 총회 대표연설을 통해 “정기국회에서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을 위한 법률 개정안과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의 동의안을 논의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고용부 차관을 비롯한 정부와 노동계, 경영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제노동정책협의회를 열어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의 비준에 관련된 의견을 들을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경영계는 한국이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노사관계에서 노조로 무게가 더욱 기울어질 수 있다고 바라본다.
이에 따라 정부가 파업 도중의 대체근로 허용이나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연장 등 노동제도 개편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도 국제노동기구 총회에서 “개별 국가의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은 문화·역사적 특수성이 있다”며 “고유한 상황에 맞는 노동시장 생태계를 꾸려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야당도 경영계와 비슷한 의견을 보이고 있어 국제노동기구의 핵심협약 비준 동의안이 정기국회에 상정되더라도 의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제노동기구의 핵심협약 비준과 다른 노동현안을 묶어서 논의할 노동개혁특별위원회를 꾸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5월 정부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의 비준 추진을 공식화하자 “이 문제를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해야 하는 점을 생각해 결정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이 장관이 비준 추진안에서 제외한 제105호를 포함해 핵심협약 4개가 모두 비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총파업을 준비하는 배경에도 국제노동기구의 핵심협약 비준 문제가 포함돼 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도 국제노동기구의 핵심협약을 조건 없이 먼저 비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 장관이 노사 논의를 충분히 끌어낼 시간도 사실상 제한돼 있다. 유럽연합(EU)이 한국에서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는 노력이 미흡해 보인다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4일 한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에 명시된 전문가패널 소집을 공식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2개월 안에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패널을 구성해야 한다.
전문가패널이 구성되면 90일 동안 정부와 국제기구, 시민사회 자문단 등의 의견을 바탕으로 권고와 조언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다. 늦어도 12월 초에는 보고서가 나오는 셈이다.
한국 정부가 전문가패널의 보고서를 따르지 않아도 무역제재를 직접 받진 않는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수입통관 절차를 까다롭게 만드는 등의 비관세 제재를 시행할 가능성도 만만찮다.
이 장관도 4월 정책간담회에서 “한국이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의 비준을 계속 미뤄도 유럽연합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라고 우려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