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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문재인의 사람', 정치감각과 기획력 뛰어나
이규연 기자 nuevacarta@businesspost.co.kr 2019-05-24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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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양정철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연구소인 민주연구원 원장이다.

2020년 총선에 대비한 민주당의 선거전략 연구와 인재 영입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1964년 7월4일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언론노보 기자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도우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노무현정부에서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맡으면서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안면을 텄다. 그 뒤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뒤 주변 인물과 조직관리를 실질적으로 전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이후에는 ‘백의종군’을 앞세워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2년여 만에 민주연구원장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정치적 감각과 기획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계에 처음 들어왔던 시절부터 그를 보좌하면서 총선과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노무현정부 시절부터 독설로 종종 논란을 빚었다. 최근에 대화와 상생을 강조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민주연구원장 맡아 민주당의 총선 승리 특명
2019년 5월14일 민주연구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복귀해 2020년 총선에 대비하고 있다. 양정철도 취임 직전인 2019년 5월13일 “민주연구원은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라고 말했다.

하반기에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고 알려졌다. 자유한국당이 지지층 결집에 힘쓰는 점을 고려해 중도층의 지지를 모을 방안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은 취임 직후 출근길에서 기자들에게 “총선 승리의 대의 앞에서 국민 앞에 겸허하게 ‘원팀’이 되겠다”며 “민주당 안에 ‘친문재인’과 ‘비문재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천 물갈이’를 이끌 수 있다는 전망에 양정철은 “수혈할 때 몸안의 피를 빼내고 하지는 않는다”며 “헌혈을 하면 새 피와 기존 피가 어우러진다”고 반박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2019년 5월14일 기자간담회에서 “민주연구원장은 연구원장이고 당이 선거를 치른다”고 선을 그었다.

민주연구원장으로 취임한 뒤 정치행보를 폭넓게 보여주고 있다.

2019년 5월16일 정책연구소 수장으로는 이례적으로 문희상 국회의장을 단독으로 만났다. 5월1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정계복귀를 권유해 화제에 올랐다.

다만 양정철이 역할과 비교해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도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이 2020년 총선에 직접 출마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양정철은 “자기 정치를 하러 오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왼쪽)이 2019년 5월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 토크콘서트에서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의종군’ 선언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이자 ‘실세’로 꼽혔다. 이 때문에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양정철도 정부나 청와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양정철은 2017년 5월16일 기자들에게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는 제목의 메시지를 남기면서 정계와 거리를 두겠다고 했다. 그 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작은형의 집에서 머물다가 일본 도쿄로 거처를 옮겨 2년여를 보냈다. 2018년 4월부터는 도쿄 게이오대학교 법학과 방문교수로 일했다.

양정철은 2018년 1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정계와 거리를 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의 ‘친노무현’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 정계를 떠났다고 설명했다. 당시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은 가까운 측근이 적은 편이라 내 동선이나 움직임이 주목을 받고 뭘 해도 기사가 되는 일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2018년 초에 ‘세상을 바꾸는 언어’를 출간한 뒤 국내와 미국에서 여러 차례 북콘서트를 여는 행보를 보였다. 이때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북콘서트에 참석하면서 양정철의 정계복귀 가능성이 계속 제기됐다.

2019년 3월 일시 귀국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는 등 정계복귀 의사를 타진했다. 결국 민주당에서 제안한 민구연구원장 자리를 수락하면서 정계에 돌아오게 됐다.

△민주당에서 문재인과 함께하다
2012년 총선 출마에 도전했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뒤 문재인 민주당 대표를 보좌하는 데 힘썼다. 특히 인재 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 도전했을 당시 새누리당 출신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국민통합위원장으로 끌어들여 주목을 받았다. 이때 양정철이 윤여준 전 장관의 영입에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양정철은 2012년 대선 선거운동을 하던 도중인 2012년 10월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내부에서 ‘친노무현’ 세력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진 데 따른 조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쓴잔을 마신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2013년 12월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내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이와 함께 양정철도 정계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당시 ‘친노무현’ 참모진이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던 점을 놓고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양정철 등을 향한 신뢰를 나타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민주당 대표였을 때 보수계 거물인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웠다. 이때도 양정철이 김종인 전 의원의 영입에 힘쓴 것으로 전해졌다.

양정철은 2016년 총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가 표창원 김병기 조응천 등 ‘문재인 키즈’로 불리는 인사 20여 명을 영입할 때도 실무를 담당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이 운영하던 가게에 열 차례 넘게 방문하는 등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인 끝에 민주당의 2016년 총선 승리에 기여하면서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6월 더불어민주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네팔로 떠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을 때 양정철은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함께 동행했다.

2016년부터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대선 준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광흥창팀’에 참여했다. 광흥창팀은 문재인 후보의 일정, 정책, 메시지, 조직 등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2017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부실장을 맡아 해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2019년 5월14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서거 전후, 문재인의 정계 입문을 이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퇴임한 뒤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을 때 양정철과 윤태영 전 청와대 비서관을 불렀다. 양정철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집필 작업을 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하자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노 전 대통령의 글을 여러 개 올리면서 슬픔과 추모하는 뜻을 나타냈다.

2009년 9월 출범한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당시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였던 문재인 대통령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때 문재인의 정계입문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1년 내놓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기획하고 집필을 도왔다. 반향이 커지자 전국 각지를 도는 ‘북콘서트’를 기획해 문 대통령을 설득한 끝에 승낙을 받았다.

이 책과 북콘서트 흥행을 기반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정계에 입문하면서 양정철은 ‘문재인을 호랑이 등에 태운 인물’이자 ‘킹메이커’로 불리게 됐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양정철은 2002년 노무현 새정치민주연합 대선후보의 언론보좌역을 맡으면서 정계에 들어왔다. 언론노보 기자 시절 지인인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의 요청을 받아 합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으로 들어갔다가 2003년 12월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인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과 함께 청와대에서 일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퇴임할 때까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5년 동안 일하면서 ‘실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해 언론 보도의 요약과 대응방안 등을 담은 언론분석 보고서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2004년 7월에 신행정수도 건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자 양정철은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비판해 구설수에 올랐다.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서 기자실 통폐합을 뼈대 삼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의 시행을 주도했다. 이때 언론과 부딪치는 과정에서도 거친 언사를 종종 보여 ‘싸움꾼’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대선 도전 실패 등을 겪으면서 이전보다 말과 행동이 유화적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양정철은 2018년 1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가 여론이나 정치권으로부터 과도한 공격과 비판을 받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강하게 대응했지만 공직자로서 현명한 처신은 아니었다”며 “언론이나 야당 의원에 거친 말과 공격적 언사를 한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노보 기자에서 홍보팀으로
시민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일하다가 1988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언론노보(현 미디어오늘) 기자로 자리를 옮겨 1994년까지 일했다.

1990년 군 보안사령부에서 일하던 윤석양 이병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포함한 민간인 1300여 명의 사찰 카드를 지닌 채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윤석양은 대학교 선배인 양정철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양정철은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등과 논의한 끝에 윤석양 이병에게 받은 자료를 학교 선배인 이인우 한겨레 기자에게 넘겼다. 그 뒤 윤석양 이병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겨레도 관련 사안을 보도하면서 보안사령부가 기무사령부로 간판을 바꾸게 됐다.

양정철은 1994년 나산그룹 홍보실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부터 1997년 동안 한보그룹 홍보실에서 일했다. 이때 정태수 한보그룹 총괄회장의 홍보업무를 맡았던 점 때문에 훗날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을 때 ‘한보 사태’와 관련됐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2001년 스카이라이프 홍보실장을 지냈다. 2002년 회사의 주요 현안사항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학생운동가 양정철
서울 우신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읽으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국문학과 진학을 희망했지만 돈을 벌길 바랐던 부모의 뜻을 따라 198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외대에서 외대학보 편집장과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회장을 역임했다.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어 1987년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 위원장을 맡았다. ‘학투련(학살원흉 즉각퇴진과 노태우집권분쇄를 위한 학생투쟁연합)’ 부의장도 지냈다. 이 때문에 수배자에 올라 오랫동안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 시위에 참여했다가 1988년 구속돼 1년 동안 복역했다. 양정철은 블로그 ‘양정철닷컴’에 올린 글에서 “경찰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검거됐다는 9시 뉴스를 보다가 TV를 부순 뒤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며 “화해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내정자가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민주연구원에서 열리는 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의 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오던 도중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의 씽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으로 영입되면서 2020년 총선에 대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에 임기 4년차로 접어든다. 이를 고려하면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해야 문 대통령도 국정 운영동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의 정계 입문부터 대선 승리에 이르기까지 보여줬던 기획력과 친화력을 토대로 민주당의 인재 영입과 선거전략 구상에 힘쓸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양정철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최측근 인사로서 민주당 내부의 ‘비문재인’계 인사들과 갈등을 빚을 수 있다는 전망도 지적되고 있다.

민주당은 당정청 관계에서 청와대에 다소 밀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양정철이 민주당 안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친정 체제’ 구축에 일조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를 고려해 양정철도 민주연구원장 취임 이후 “수혈할 때 몸안의 피를 빼내고 하지는 않는다”며 “민주연구원이 인재 영입의 전진 기지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양정철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총선 출마를 권유하는 등 폭넓은 행보를 나타내고 있는 점도 ‘스포트라이트’를 지나치게 끌어 모으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 평가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오른쪽)이 2018년 3월10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북콘서트 '함께한 시간, 역사가 되다'에서 '3철'로 불리는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렸을 때 가난에 시달리면서 종종 전학을 다녔다. 이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책을 더 많이 읽으면서 글쓰기에 친숙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매해 언론사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했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의 문예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게 됐다.

‘원조 친문재인’으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노무현재단을 거쳐 더불어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계속 함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은 양정철을 ‘양비(양 비서관)’이나 ‘양 교수’로 부른다. 문 대통령이 반말을 쓰는 몇 안 되는 지인으로도 알려졌다.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직후 ‘백의종군’을 선언하기 전에 그 사실을 먼저 알리자 문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졌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함께 문 대통령의 ‘복심’인 ‘3철’로 불리기도 했다. 보수야당 등으로부터 문 대통령의 비선실세라는 비난도 들었다.

양정철은 2017년 3월 조선펍 인터뷰에서 “나는 문재인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을 때 소소한 일을 밖에서 돕는 집사 역할을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2017년 대선 당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호흡을 맞추면서 친분을 쌓았다. 평소에도 폭탄주를 함께 마시는 사이로 알려졌다.

다만 양정철 등의 ‘구주류’와 임종석 전 실장의 ‘신주류’가 갈등을 빚는다는 관측도 일각에서 나왔다. 이를 놓고 양정철은 “임 전 실장은 내가 업어주고 싶은 사이”라고 부정했다.

기획력과 글쓰는 능력이 매우 좋은 인사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1년 내놓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의 기획과 집필에 전면 참여했다.

미디어와 관련된 경험이 풍부하다. 대학신문과 언론노보, 민간기업 홍보실, 청와대와 총리실 홍보, 정당과 대선 홍보기획 등을 모두 경험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청와대 블로그 ‘시시비비’에 직접 쓴 글을 종종 올렸다.

블로그 ‘양정철닷컴’과 트위터를 운영하면서 글을 활발하게 올렸지만 2012년 총선에 도전했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뒤에는 양쪽 모두 활동을 중단했다.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시절 강한 발언과 행동을 보여줬다. 일각에서는 독불장군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강한 충성심을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스스로도 ‘노무현의 마지막 참모’로 평가했다.

저서 ‘세상을 바꾸는 언어-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이후 ‘백의종군’을 선언한 뒤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블로그 ‘양정철닷컴’에서 스스로의 키워드를 의리, 투지, 온기로 꼽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재단 이사장 시절 “양정철은 노무현 정부 시절 수구언론으로부터 대통령 다음으로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건사고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왼쪽)이 2018년 3월8일 서울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북콘서트 '대통령의 글쟁이들'에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과 이야기하던 도중 웃고 있다. <연합뉴스>
△유시민에게 정계복귀 권유
2019년 5월1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정계복귀를 강하게 권유했다.

유시민 이사장이 노무현 정부에서 비교적 이른 나이인 47세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던 점을 이야기하면서 민주당 내부의 대선주자 경쟁에 참여하면 좋겠다고 거듭 요청하기도 했다.

유시민 이사장은 양정철의 권유에 “원래 자기 머리는 자기가 못 깎는다”고 대답했다. 이 때문에 유 이사장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다는 전망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자 유시민 이사장은 2019년 5월21일 KBS1 ‘오늘밤 김제동’에 나와 “2013년 2월 정치를 떠난다는 SNS 글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공무원이 되거나 공직선거에 출마하는 일을 생각한 적 없다”고 해명했다.

양정철도 2019년 5월22일 유시민 이사장의 어머니 서동필씨 빈소에 들린 뒤 기자들에게 “나는 이제 유시민 선배에게 말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전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2012년 총선 출마 실패
양정철은 2012년 19대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로서 서울 중랑을 지역에 출마할 의지를 보였다. 어렸을 적 살았던 경험이 있고 학생운동을 했을 때도 머물렀던 인연을 들었다.

당시 이곳의 지역구 의원이 조선일보 출신이자 ‘친노무현’ 인사들과 대립했던 진성호 한나다랑 의원이었기에 ‘친노’ 대 ‘친이’ 구도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러나 양정철은 민주통합당 경선 과정에서 박홍근 전 경희대 총학생회장에게 쓴잔을 마셨다. 그 뒤 2012년 3월11일 블로그에 “중랑구민의 선택을 받기에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중랑의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역할로 대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3월 조선펍 인터뷰에서 정치를 할 생각이 있는지 질문받자 “누가 밀어준다 해도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2019년 5월 민주연구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그가 2020년 총선에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지만 양정철은 “민주당을 위해 헌신하러 왔다”며 부인하고 있다.

△유진룡 경질과 ‘배째’ 파문
2006년 유진룡 문화관광부 차관이 임명 6개월 만에 물러난 뒤 청와대 홍보기획실에서 추천한 아리랑TV 부사장 인사를 거부한 점이 경질 이유라고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유진룡 전 차관은 당시 양정철이 그와 통화하는 과정에서 “배를 째 드리겠다”고 폭언했다고 주장했다. 양정철은 유 전 차관과 통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폭언을 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양정철은 2017년 3월 조선펍 인터뷰에서 ‘배를 째 드리겠다’를 정말 말했는지 여부를 질문받자 “100% 허위사실이고 당시 소송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말려 그렇게 못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삼성그룹에 행사비 요청 물의
양정철은 2004년 9월에 열린 디지털방송 선포식 행사와 관련해 삼성그룹 고위 임원에게 행사 분담금을 부담해 달라고 요구해 도마에 올랐다. 이 행사는 정부 부처와 가전회사들이 디지털방송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로 노무현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 사안이 보도되자 양정철은 처음엔 사실을 부인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뒤 삼성그룹 임원에게 행사분담금을 부담할 뜻이 있는지 물어봤던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다만 삼성그룹이 분담금을 실제로 내진 않았고 행사 비용을 정부와 방송사가 모두 치른 만큼 분담금 부담을 압박하거나 강요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2004년 9월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자 양정철은 “삼성그룹 임원에게 부담이 될까봐 짧은 생각에 거짓말을 했다”며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다”고 사과했다.

△스카이라이프에서 해고
2001년 스카이라이프 홍보실장을 지냈다. 그러나 2002년 회사의 주요 현안사항을 외부에 유출해 언론의 비판적 보도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양정철은 해고 직후 스카이라이프를 상대로 해고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승소했으나 회사에서 불복해 항소심이 진행되던 도중 2005년 4월 해고 무효를 확인하는 서울고등법원의 조정안을 양정철과 스카이라이프 양쪽 모두 받아들였다.

△민주화 운동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던 시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한국외대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88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돼 1년 동안 복역했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2018년 1월17일 인천공항에서 입국하던 와중 기자들을 보고 놀라고 있다. <연합뉴스>
1988년 언론노보(현 미디어오늘) 기자로 들어가 1994년까지 일했다.

1994년 나산그룹 홍보실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한보그룹 홍보실에서 일했다.

2001년 스카이라이프 홍보실장을 지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서 언론보좌역을 맡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공보비서를 지냈다.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국내언론행정관으로 임명됐다.

2003년 12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승진했다.

2004년 8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됐다.

2009년 9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 뒤 노무현재단에서 상임운영위원으로 일했다.

2014년 4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했다.

2018년 4월부터 일본 게이오대학교 법학부 방문교수로 일했다.

2019년 5월부터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 학력

서울 우신고등학교를 7회로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오른쪽)이 2011년 7월29일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문재인의 운명' 북콘서트에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가운데),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3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이었지만 일찍 퇴직했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블로그 ‘양정철닷컴’에서 큰형은 신학 박사이자 목사이고 작은형은 대기업 증권사에 근무하다가 뉴질랜드로 이민갔다고 밝혔다. 누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퇴직했다고 했다.

1994년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1995년 아들을 얻었다. 장인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연합뉴스에서 정년퇴직했다.

◆ 상훈

2007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기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복역하면서 병역이 면제됐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2008년 3월28일 내놓은 고위공직자 재산등록사항을 살펴보면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었던 양정철은 2007년 기준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액을 13억3280만 원으로 신고했다. 본인의 예금액은 9억6704억 원이었다.

'노무현의 사람들 이명박의 사람들'(2012), '세상을 바꾸는 언어'(2018) 등 저서 2권을 썼다.

어록
[Who Is ?]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
▲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2006년 8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에서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제시했다. 사회적경제가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이자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2019/05/21, 서울 여의도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열린 ‘사회적경제, 문재인 정부 2년 평가와 과제’ 토론회 축사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노무현 정부 때 복지부 장관을 했는데 그때 나이가 47세다. ‘소년 급제’한 것이다. 벼슬을 했으면 그에 걸맞은 헌신도 해야 한다. 지금 우리 당에는 다음 대선에 잠재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기존에 거명된 사람에 유 이사장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정도가 가세해 경쟁하면 국민이 보기에 얼마나 안심이 되겠는가.” (2019/05/18,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열린 토크콘서트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게 정계 복귀를 권유하면서)

“정권 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여러 가지 갑갑한 상황을 보면서 역시 정권 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라는 절박함이 생겨 총선에 뭐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9/05/14,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으로 취임한 뒤 출근길에서)

“우리는 흔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여러 사람이 함께하도록 손잡아야 할 때도 많은 것 같다. 오른손을 폈을 때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처럼 온기가 널리 퍼지는 사회를 꿈꾼다.” (2019/07/17,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으로부터 ‘아이스버킷 챌린지’ 주자로 지목받자 보낸 메시지에서)

“남은 4년은 방랑자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는 전직 대통령의 비서관을 찜해뒀다.” (2018/01/30,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 ‘세상을 바꾸는 언어’ 북콘서트에서)

“(내가 문재인 대통령의 옆에 있는 일은) 양날의 칼 혹은 양면성이 있다고 본다. 만일 내가 옆에 있다면 대통령이 좀 편하거나 덜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면 시스템을 깰 수가 있다. 그런 문제로 대통령을 성가시게 하거나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2017/12/26,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나는 한때 세상에 분노했고 학생운동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후보는 어려운 가운데 성장했음에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노동을 한 아버지, 청소부를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세상을 다시 봐야겠다고 느꼈다.” (2017/03/21, 조선펍 인터뷰에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범야권이 모두 힘을 합쳐 이번 총선에서 이기면 무엇을 하겠다는 청사진을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당 지도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명박 정권의 무엇을 어떻게 심판하겠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이명박 정권 같은 정권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무엇을 하겠다, 그 무엇이 뭔지 모르겠다. 이 와중에 다수당이 된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과거 열린우리당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2012/02/14, 19대 총선에 도전장을 낸 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정치적 승부사’, ‘정치 10단’, ‘한판 뒤집기의 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표현 가운데 가장 우스운 표현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바보스럽게, 단순하게 가고자하는 뜻을 편 건데 그것을 마치 고도의 판단을 가지고 하는 것처럼 보는 게 우습다.” (2010/05/11,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특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말 건강검진에서 금연을 강력히 권고 받고 권양숙 여사도 금연을 권고해 결국 담배를 끊었는데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 다시 줄담배를 피웠다. 최근에 ‘내가 괜히 정치를 하고 대통령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며 괴로워하고 자책하는 말을 많이 했다.” (2009/05/2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한겨레 기사에서)

“나는 정부와 언론 관계를 더욱 선진화된 방향으로 가게 만들기 위한 ‘사육신’이 되면 되었지 간신은 아니다.” (2007/05/31,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출연해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주도하는 데 따른 ‘지록위마 간신’ 발언을 반박하면서)

“솔직히 어이가 없다.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대단원의 ‘욕 사전’처럼 보인다.” (2007/02/21, 청와대브리핑에 올린 ‘학자라면 학문적으로 말하십시오’ 글에서 조선일보의 ‘노무현 정부 4년 평가’ 특집기사를 비난하면서)

“효자동 강아지가 청와대를 보고 짖기만 해도 정권 흔들기에 악용하는 심보가 작용했다. 대통령의 내각 통할기능, 기강 유지기능, 평가와 권한, 임면의 권한을 어쩔 땐 코드, 어쩔 땐 보복이라고 말장난 하지 말아야 한다. 야당도 그렇게 한가하고 자신이 있으면 면책특권을 포기하고 당당하게 진실을 가리는 장으로 나와야 한다.” (2006/08/17, 오마이뉴스 기고문에서 자신이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에게 인사를 청탁하는 과정에서 폭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과 일부 매체를 향해)

“독대는 가신·안방·밀실정치의 산물이었기에 폐지했다. 이는 정치의 투명성과 정책결정 과정의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2006/05/18,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톱거리가 없으면 차라리 백지를 내라’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독대 금지 원칙을 비판한 일부 매체를 향해)
korea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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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사람은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곳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
인재를 진흑에 묻어 둘 이유가 없을겁니다
꼭 필요할 때 잘 나오셨다고 생각합니다
   (2019-05-28 09:5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