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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문라이트' 스틸이미지. |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셰익스피어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의 대사다. 구속된 소설가 이인화(류철균)씨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 제목으로 빌리기도 했다.
인간의 정체성을 둘러싼 주제는 문학작품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꾸준한 관심을 받는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열(혹은 그 징후)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철학의 흐름에서 보자면 개인은 그저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되는’ 주체일 따름이다. 끊임없는 서사의 변주가 가능한 이유다.
2월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신작영화 3편이 22일 나란히 개봉했다. 외화 가운데 ‘23아이덴티티’와 ‘문라이트’, 한국영화 ‘루시드 드림’은 인간 정체성 혹은 이를 구성하는 기억에 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화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3아이덴티티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공포스릴러다. 샤말란 감독은 1999년작 심리스릴러 ‘식스센스’를 내놓아 당시 큰 반향을 불렀다.
브루스 윌리스가 액션배우 이미지를 벗고 아동심리학자로 나와 색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영화다. 그에게 상담치료를 받는 소년 역으로 분했던 할리 조엘은 성인이 되면서 외모적으로 완전히 망가졌지만 당시 영화에서는 천진하면서도 귀여운 얼굴로 섬뜩한 반전효과를 극대화해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이 기억하는 명장면을 남겼다.
샤말란 감독은 이번 신작에서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보인다. 무려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을 통해 인간 안에 감춰진 다중적 본성과 그에 따른 공포를 다룬다. 내안의 또 다른 나인 셈인데 제임스 맥어보이의 탁월한 연기력이 더해져 스릴러로서 긴장감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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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23아이덴티티' 포스터. |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단숨에 박스오피스와 실시간 예매율 1위로 올라섰다. 샤말란 감독의 이름값과 제임스 맥어보이의 인기 덕분에 관객의 기대를 모으는 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개봉한 한국영화 ‘재심’과 ‘조작된 도시’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경쟁작이 없기 때문인 듯도 하다. 개봉 이후 관객반응은 호불호가 크게 엇갈린다. 공포스릴러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거품이 많이 낀 실망스런 영화란 반응도 적지 않다.
23아이덴티티가 공포스릴러 장르로 상업성을 노렸다면 ‘문라이트’는 서정적 감성이 물씬한 영상미를 만날 수 있는 예술영화다. 문라이트는 미국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소년이 사랑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기를 다룬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다른 것은 주인공 소년이 흑인이자 성소수자란 점이다. 이런 설정은 특수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가능한 서사적 장치로 쓰인다. 인간이란 보편적 존재이자 미국사회에서 여전한 유색인이면서 이에 더해 사회적 편견과 폭력까지 견뎌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문라이트란 제목은 원작희곡인 ‘달빛 아래서 흑인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영화에서도 이런 제목만큼이나 서정적인 장면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골든글로브 영화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데 이어 26일 열리는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 주요 8개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올해는 특히 트럼프 정부의 백인우월주의가 노골화하면서 역시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다미엔 차젤레 감독 ‘라라랜드’와 경쟁에서 아카데미가 어느쪽의 손을 들어줄지 전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영화 ‘루시드 드림’도 소재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장르는 범죄스릴러인데 주인공이 꿈을 통해 범인을 찾는 단서를 깨닫는다는 설정이다.
영화사 측은 영화를 소개하며 한국영화 처음으로 제목그대로 자각몽을 소재로 한 점을 내세웠는데 꿈을 모티브로 한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떠올릴 법하다.
김준성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자 고수씨와 설경구씨가 연기변신에 도전했다. 소재와 출연진만으로 기대가 컸는데 개봉이후 성적은 좀더 지켜봐야할 듯하다.
실시간 예매율에서 비슷한 시기 개봉한 이병헌 공효진 주연의 ‘싱글라이더’에 비해 크게 뒤처지며 개봉 첫 주말을 앞둔 24일 기준 9위에 그친다.
정신분석학에서 꿈은 무의식의 저장소이자 '나 아닌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장소로 간주된다. 소재 자체는 높이 살만한데 서사적 얼개가 관객들의 기대치에는 크게 못미치는 듯해 아쉬움을 남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