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들을 두루 살펴보면 외부 출신 인재도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직에는 모두 롯데 공채 출신을 앉혀놨다는 점에서 롯데그룹 고유의 순혈주의가 변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지적을 단번에 해소했던 것이 바로 2년 전인 2021년 11월 말에 실시한 인사였다.
당시 신 회장은 롯데그룹을 크게 4개의 사업군으로 쪼개고 각각의 사업군에 HQ체제를 도입하며 유통군HQ의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이사로 김상현 부회장을 영입했다.
김 부회장은 롯데그룹과 결코 인연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국과 인연도 많지 않았다.
김 부회장은 글로벌 소비재기업인 P&G에서만 30년가량 일했다. 한국 홈플러스 대표를 2년가량 맡았다가 다시 홍콩계 리테일기업인 DFI리테일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3년 넘게 일했다. 경력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낸 인물이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의 수장에 발탁된 것은 말 그대로 파격적이었다.
신 회장은 김 총괄대표를 영입하며 부회장이라는 직함까지 달아줬다. 그동안 롯데그룹 부회장은 정통 롯데맨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방안이 먹혀들지 않으니 외부인의 눈으로 롯데그룹 유통사업의 활로를 찾아달라는 의미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김 부회장은 영입 직후인 2022년 상반기에만 롯데쇼핑에서 급여로 6억 원 이상을 수령했는데 이는 롯데쇼핑 역사상 없던 일이었다. 신 회장이 김 부회장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 회장은 김 부회장 영입과 동시에 롯데쇼핑 백화점사업부장(롯데백화점 대표)에 신세계그룹 출신의 정준호 대표를 발탁하기도 했다.
롯데쇼핑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롯데백화점에 경쟁기업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앉혔다는 것은 내부 임직원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년 전 실시된 정기 임원인사는 롯데그룹이 공채 출신을 전문경영인으로 선임하던 기존의 관행인 순혈주의를 깨고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인사였다”며 “이후 재계에서는 롯데그룹에 더 이상 순혈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돌았다”고 말했다.
신 회장이 김 부회장과 정 대표 발탁에 앞서 2021년 3월 롯데쇼핑 이커머스사업부장(롯데온 대표)에 이베이코리아 출신의 나영호 대표를 영입한 것도 외부인의 시선에서 롯데그룹을 바꿔보겠다는 의지와 맥이 닿아 있다.
신 회장이 외부 출신 인재들을 통해 추진한 변화는 실제로 존재했다. 보수적이고 경직됐다는 조직 문화가 외부 인재들의 영입 이후 훨씬 유연해졌다는 점은 롯데그룹 안팎의 공통된 평가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부 출신 인재들의 성과를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전문경영인의 성적표라고 볼 수 있는 실적을 보면 외부 인재를 영입한 효과가 실재하는지 의문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며 “롯데그룹 내부에서도 부진한 실적을 볼 때 고강도 쇄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들린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1~3분기에 영업이익 2680억 원을 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이익 규모가 16.7% 빠졌다. 롯데온 역시 1~3분기에 영업손실 640억 원을 내며 적자를 지속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으로서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직 문화의 변화 이외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을 계속 중용하는 것이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외부 출신 인재들이 유통업계의 이슈몰이에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한국 유통업계에서 가지는 위상은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지난 2년 동안 외부 인재들이 그 위상에 걸맞게 유통업계를 선도해왔는지를 놓고 보면 성과가 있다고 보기 힘들어 보인다”며 “신세계그룹이나 현대백화점그룹은 각자의 전략대로 주목받았던 지점들이 있는데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들에게 그런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보면 이번 인사에서는 외부 인사를 중용하는 기조에 방향을 바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외부 인사의 적극적 영입 탓에 주요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던 롯데맨들의 설 자리가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롯데그룹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해 경력을 쌓아온 롯데맨들은 롯데그룹의 역사와 전통, 고유의 조직 문화 등을 체득해온 만큼 현재 회사의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해 개선점을 찾아내는데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미 김상현 부회장과 정준호 대표, 나영호 대표 등이 변화의 씨앗을 뿌려놓은 상황이라면 이들이 다져온 변화의 토대 위에 롯데그룹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이 재계 안팎의 관측이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