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재 기자 piekielny@businesspost.co.kr2023-11-20 15:59:14
확대축소
공유하기
[비즈니스포스트] “교복처럼 익숙해진 노란 넥타이와 같은 행복한 추억만 안고 간다.”
윤종규 KB금융지주 대표이사 회장은 17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에서 열린 임기 마지막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이렇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 윤종규 회장이 9월25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에서 CEO 기자간담회 도중 일어나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노란 넥타이는 윤 회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노랑은 KB금융을 대표하는 색이다. 윤 회장은 KB금융 회장에 오른 뒤 항상 노란 넥타이만 맸다.
하지만 이제 윤 회장에게 노란 넥타이는 ‘행복한 추억’으로 남게 됐다. 동시에 윤 회장은 또 다시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섰다.
윤 회장은 20일 서울 여의도 KB금융 본사에서 비공개 퇴임식을 열고 2014년 11월부터 이어졌던 9년 임기를 마무리했다.
퇴임식은 지주 임직원을 모아놓고 그동안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조촐한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KB금융에서 임기는 끝났지만 금융권에서는 윤 회장이 KB금융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윤 회장은 은행 외길을 걸었던 대다수 금융지주 회장과 달리 새로운 출발에 익숙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 회장은 KB금융 외에 다른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50살을 몇 년 앞두고 KB금융에 합류했다.
윤 회장은 광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외환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의 문을 열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야간과정을 다니며 회계학을 공부했고 회계사시험에 합격하며 회계사의 삶을 시작했다.
윤 회장의 2번째 출발은 1980년 삼일회계법인에서 시작됐다. 이후 20년 넘게 삼일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일하며 부대표까지 올랐다.
윤 회장은 회계사로서 살았던 삶이 KB금융에 몸담았던 기간보다 더 길다. 이는 윤 회장이 금융권 전체를 대표하는 재무전무가로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 회장은 2002년 삼일회계법인을 떠나 KB국민은행에 새 둥지를 틀면서 3번째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당시 김정태 전 KB국민은행장이 윤 회장을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한 일화는 금융권에서 유명하다. 김정태 전 행장은 윤 회장을 ‘상고 출신 천재’라고 소개했고 상고 출신 천재는 여전히 윤 회장 앞에 붙는 주요 수식어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윤 회장은 국민은행에 새 둥지를 튼 지 2년7개월 만에 국민카드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회계처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KB금융을 떠났다.
이후 2005년 김앤장법률사무소 상임고문을 맡으며 4번째 새 출발을 시작했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5년가량 일했으나 2010년 KB금융지주 CFO(최고재무관리자)로 다시 KB금융에 돌아왔다.
▲ 9월25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에서 열린 CEO 기자간담회에 마련된 윤종규 회장 책상. 메모지, 볼펜, 텀블러까지 노란색으로 채워졌다. <비즈니스포스트>
윤 회장이 양종희 KB금융 회장 내정자와 호흡을 본격적으로 맞추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양종희 내정자는 윤 회장이 지주 CFO를 지내던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지주 경영관리부장을 맡았다.
다만 윤 회장은 당시 내부 힘 싸움에 밀리면서 2013년 다시 김앤장법률사무소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1년 뒤인 2014년, KB금융지주 회장 겸 KB국민은행장으로 복귀하며 화려하게 5번째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이후 2번의 연임을 거쳐 9년 동안 KB금융을 이끌었고 이날 회장 임기를 마치고 다시 새로운 출발점 앞에 선 것이다.
1973년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뒤 6번째 굵직한 새 출발을 눈앞에 둔 셈인데 금융업계에서는 윤 회장의 이력과 역량, 무게감 등을 놓고 볼 때 향후 또 다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윤 회장은 지난 9년 동안 KB금융을 더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취임 당시 KB사태로 불렸던 지배구조 불확실성 문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KB금융을 국내 리딩금융지주 자리에 굳건히 올려놓았다.
이에 따라 윤 회장은 삼일회계법인, 김앤장법률사무소, KB금융 등 국내 각 분야의 1등만 거친 이력을 더하게 됐다.
윤 회장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지난 주 회장이 결정된 은행연합회 회장 선거에서도 현직 가운데 유일하게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본인이 직접 고사하며 최종 투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금융업계에서 윤 회장의 무게감과 향후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윤 회장의 향후 실현 가능성 높은 행보로는 은행연합회 같은 금융권 주요 협회장 역할이 꼽힌다.
최근 은행연합회장에 내정된 조용병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물론 과거 지주 회장 가운데 협회장을 맡은 경우는 종종 있었다. KB금융지주 1대 회장을 지낸 황영기 전 회장도 KB금융 회장 이후 금융투자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윤 회장이 행정, 정치 쪽으로 새로 발을 들여 국가 전반의 금융정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도 있다.
▲ KB금융에서 올해 여름 발간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속 CEO메시지 사진. 윤 회장은 당시 “KB금융에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으로 성원을 보내주시는 고객님과 주주님, 아울러 KB금융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모든 분들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행정은 윤 회장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 윤 회장은 1981년 행정고시 1,2차 시험에 합격했으나 25회(1981년), 26회(1982년) 3차 면접에서 잇따라 탈락했다.
과거 학내 시위에 연루됐던 점이 문제가 되면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는데 윤 회장은 당시 총무처 장관에게 문제를 지적하는 자필편지를 보낼 정도로 열정을 지녔다.
윤 회장이 당시 3차 면접을 통과했다면 행시 25회 출신인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 행시 26회 출신인 이석준 NH농협금융지주 회장, 김동연 경기도지사 등과 동기로 지냈을 수도 있다.
향후 윤 회장이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간 금융사 출신 국회의원 사례는 점점 늘고 있다. 현재도 미래에셋대우 대표를 지낸 홍성국 민주당 의원, 카카오뱅크 대표 출신인 이용우 민주당 의원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다만 국내 리딩금융인 KB금융을 10년 가까이 이끈 무게감을 지닌 만큼 윤 회장이 쉽게 다음 행보를 결정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더군다나 오랜 기간 쉼 없이 달려온 만큼 당분간은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해 보인다.
윤 회장은 9월 진행한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퇴임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거기까지 생각을 깊게 못해 봤다. 아직 (임기가) 2개월 정도 남았으니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한재 기자